[솔밍] Vantablack :: 0.0
2019. 11. 22. 22:27*Summer depression_Girl in red
*예전에 썼던 글 솔밍으로 치환 뒤 재업입니다.
*저는 조소과가 아닙니다. 열심히 조사했지만 지식이 부족해서 실제 생활과는 다를 수 있으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생은 남 탓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지만, 이 수업을 듣자고 앉아 있으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 한 마디뿐이다. 강우준 개새끼. 새로 사 빳빳한 크로키 북 모서리가 꾸깃 구겨지도록 힘을 주며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어… 일단, 마음을 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누드라고 하면 거부감을 많이 가지시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잖아요, 직접 봐야 파악이 쉽고, 이렇게 왜곡되지 않은 사람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무니까 오히려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시면서 적극적으로 관찰하시고 참여하시면, 예, 많은 걸 얻어 가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일단 시키니 입은 열었지만 내 주제가 뭐라고 이런 걸 나불대고 있을까. 말이 길어질수록 점차 자각하게 되는 내 현실에 문장의 끝자락은 말려들어간 커튼 끝자락처럼 웅얼거림도, 추측도 아닌 애매함으로 끝나 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말은 말이라고 교수님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에게 박수를 시켰다. 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겸연쩍은 박수갈채가 지나가고 나자 교수님은 쐐기를 박았다. 그래도 재수강이니까 뭐라도 좀 다르긴 하네.
… 하하. 3학년이 1학년 전필 수업을 신청해 누드 크로키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강우준 이 개새끼, 죽여 버리겠다고.
Vantablack :: 0.0
_i just want to disappear
조소기초. 말 그대로 기초 수업이었다. 조소과에 입학한 이상 1학년 모두가 듣고,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수업이 조소기초였다. 그리고 그런 수업에 당당히 D-를 받아버린 게 나, 김민규 되시겠다.
원래부터 이럴 의도는 절대 없었다. 사고 쳐놓고 그럴 생각 있었다고 하는 놈 없지만, 진짜였다. 남들은 이해 못 해도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들 한두 가지쯤은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물을 마실 때 꼭 컵 손잡이 쪽으로만 마신다든가, 신발끈은 반드시 두 번 매듭을 지어야 속이 시원하다든가, 하는 소소한 집착들. 나에겐 등교가 그랬다. 그런데 대학 온 강우준이 발동 걸린 건 술이었고, 나는 그 꾐에 넘어갔다는 게 문제였다.
“자, 그럼 모델분 나옵니다. 핸드폰 확실히 다 냈지요? 나중에 걸리면 바로 F니까 고집부리지 마시고.”
교수님의 말씀에 저마다 편하게 긴장 없이 앉아 있던 새내기들이 하나 둘 꽃봉오리 피어나듯 허리를 펴는 기척이 느껴졌다. 딱히 긴장할 요소는 없지만 시작이라는 말에 괜스레 몸이 반응하게 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빼고. 모델이 벗든 말든, 내가 그걸 그려야 하든 말든 나한테 중요한 건 어떻게 하면 강우준을 가장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였다.
“모델 님, 나오셔도 됩니다.”
그 새끼가 술자리마다 날 끌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나는 반쯤 열어놓은 가방을 대충 품에 떠안고 있었고, 그걸 허술한 받침대삼아 크로키 북을 얹어놓은 채 다시 그 위에 아슬하게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때려죽일까, 말려 죽일까. 그냥 학교 호수에 확 밀어버려? 그럼 너무 쉽게 걸리려나.
팔을 괴이하게 꺾어 종잇장 한 구석에 나무에 매달린 강우준 따위를 그리고 있으려니 교수님은 교실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이동식 커튼에 대고 말을 한다. 강의실에 따로 공간을 만들긴 힘드니 누드 실기 시간마다 미리 만들어 놓는 모델용 간이 대기실이었다. 뭐야, 학생들 오기 전에 벌써 와 있었나 보네. 지가 무슨 마술쇼 주인공이야? 뭔 기척도 없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상황이 없던 탓에 나는 시작부터 매우 삐딱선을 탔다. 열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몇 광년은 떨어져 보이는 내 자세가 방증이었다. 드륵, 가볍게 의자 밀리는 소리가 커튼을 타 넘어와 교실에 울리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이번에는 그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커튼 고리가, 촤라락―
“안녕하세요.”
내 소지품도 촤라락.
“… 아. 헐. 죄송합니다. 금방 주울게요. 죄송합니다.”
크로키 북부터 가방까지 모조리 떨어져 바닥에는 내 가방 속이 그대로 다 튀어나와 행위 예술품마냥 펼쳐졌다. 심지어 필통도 열려있었던 탓에 연필, 형광펜 할 것 없이 바닥을 굴렀고, 텀블러는 아예 반대쪽 사람 의자 다리까지 굴러가 툭 부딪혀 멈춰 섰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3학년이어도 긴장은 되나 보지? 물건까지 다 떨어뜨리고 말이야. 여러분도 소지품 꽉 붙드세요―”
수치심도 의식적인 감정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깨닫는다. 혼란의 주인공이 되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으면 적당한 수치심은 느낄 법도 했지만 놀랍게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농 섞인 교수님의 말에 몇몇은 작게 웃고, 몇몇은 내가 흘린 것들을 같이 주워줬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럽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아, 감사합니다. 내 텀블러가 부딪혔던 의자 주인에게서 텀블러를 건네받으면서도 나는 지금 이게 현실이 맞는지, 지금 이 상황이 실은 꿈의 일부가 아닌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반으로 뚝 쪼개질 것 같았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러니까 여긴 평행세계 같은 거다, 좌뇌와 우뇌가 각자 개소리를 하며 시끄럽게 싸워댔다.
나는 관광객들의 물건을 보는 족족 훔쳐간다는 발리 사원의 욕심 많은 원숭이처럼 주섬주섬 어설프게 물건들을 품에 한가득 껴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강의실 한가운데 우뚝 박힌 맨발 한 쌍 앞에 곱게 놓인 연회색 형광펜은 의자에 엉거주춤 비벼 끼워 넣던 내 엉덩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일어나 펜을 줍고는 무심코 시선을 위로 들었을 때 나는 얄따란 가운만 걸친 채 비스듬히 내려 보고 있는 사선의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아, 진짜.
맞잖아.
어쩌지. 사실 나 아직 군대에서 제대도 안 했던 게 아닐까. 제발 아무나 내 뒤통수 좀 때려줬으면 좋겠다. 그 새끼 뒤통수 존나 세게 갈기고 이 등신 같은 꿈에서 깨게. 물론 그게 교수님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교수님이 진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건 아니었지만 짜악, 소리 나는 박수와 함께 교수님은 내가 자리로 돌아가길 재촉했다.
“학생, 다 주웠으면 빨리 제자리 가고. 이제 시작합니다. 포즈 변경 주기는 모델 님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재생 목록 하나 틀어놓고 노래 끝날 때마다 포즈 바꾸겠습니다.”
그럼 가운 벗을게요― 마지막 형광펜까지 챙겨 들고 어정뜬 뒷걸음질로 자리로 돌아오며 나는 나를 도닥였다. 그래, 존나 말도 안 되는 일 한 번쯤은 이제 겪을 때도 됐잖아? 별로 놀랄 것도 없지. 하지만 처량하게 가방 지퍼를 잠그고 바닥에 내려놓는 내 귀로 들어온 목소리는 내가 알던 그 목소리와 너무 정확하게 일치해 나는 아무래도 심란해진다. 한 번 보고, 두 번 듣고, 세 번 살펴도 그 애다. 사르륵, 싸구려 실크 천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히고, 이름 모를 외국 노래가 강의실을 메우자 금세 분주한 마찰음이 사방에서 가득 밀려오기 시작했다. 파도는 솨아- 하는 소리 대신 사각사각사각 하고 울었다. 밀물이 일자 새하얀 백사장에서는 흑연가루가 뭉쳐진 물거품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만 또, 외딴섬이었다.
종이에 뭉툭한 연필을 가져다 대면서 마주한 나신의 얼굴은 부정할 수도 없어서, 나는 울렁거리는 목울대를 잠재우기 위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침을 억지로 다섯 번쯤 삼켜내야 했다. 아니, 도대체. 도대체가. 어째서,
야. 도대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적나라한 나체와 마주함으로부터 오는 다소의 압박과 묘한 설렘은 막상 종이에 연필을 대는 순간, 감상도 남지 않는 관조로 치환된다. 나체는 사람의 몸이라기보다는 허연 석고상의 컬러 버전에 불과한 묘사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걸 바라보는 눈빛들은 어느샌가 납작해져 밋밋해진다. 근데 그건 씨발, 발가벗고 서 있는 인간이 생판 모르는 얼굴일 경우 한정 아닐까. 인간적으로 이걸 어떻게 그려.
내 생애 이보다 더 긴 50분은 없었을 거라고 자부한다. 인체의 형태? 근육의 위치? 그딴 건 개나 줬다. 이 수업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가도 또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50분에서 쉬는 시간 10분을 빼고 꼬박 40분을 몇십 명 학생 앞에서 나체로 서 있는 게 그 누구보다 익숙하고 편해 보이는 너를 내 눈앞에 둔 상황을 도무지 뭐라 불러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사실 전부 다 짜고 치는 몰래카메라 같은 거 아닐까. 그러니까 실은 내가 트루먼 쇼 주인공 같은 거였던 거지. 그래, 그럴 수도 있잖아. 물론 이 해괴망측한 망상은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 이른바 상식이라는 기준에 의해 바로 썰려나갔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아하,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개연성은 없을 듯했다. 이 무슨 쥬랜더 리턴즈도 울고 갈 스토리라인이란 말인가.
“끝― 다들 그만. 자, 오늘 고생해주신 모델님께 박수 한 번 드리고.”
끌려가기 싫다고 발을 모래더미에 깊게 박아 넣고 버텨 봐도 시간은 결국 멱살을 잡고 손쉽게 업어치기로 나를 넘겨버린다. 50분은 마침내 끝이 났고, 그놈의 박수타임은 또 시작이었다. 어지간히도 박수 좋아하시네. 굳이 칠 필요도 없는데 새내기는 새내기라 그런지, 병아리 날갯짓하듯 열심히 손뼉을 마주쳤고, 강의실은 수십 개의 손바닥이 파닥이는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발가벗었던 너는 박수를 받으면서 가운을 다시 걸친다. 저거 봐. 태연한 수준이 아니잖아, 저건.
패션쇼를 끝낸 모델처럼 태평함을 넘어서 익숙해 보이는 널 보고 있으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 나는 고집을 피우고 싶어 졌다. 박수를 치는 대신 깍지를 끼고 너를 노려봤다. 형광펜을 주우면서 찰나로 스쳤던 시선의 반복을 기대했다. 남몰래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들어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다시 보지 않았다.
오늘 그린 건 과제란에 업로드하라는 교수님의 말을 끝으로 학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너는 이동식 커튼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착의를 위함일 게 뻔했다. 나는 이미 다 챙긴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가, 또 이번에는 필통을 꺼냈다가, 필통에 넣었던 펜들을 책상에 늘어놓은 뒤 다시 집어넣었다가, 하면서 누가 봐도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이는 짓을 하고 있었다. 아까 쏟았으니까 정리도 좀 해야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혼자 그런 말까지 해가면서 나는 온 감각을 네가 들어간 간이 탈의실에 집중했다.
그리고 텀블러를 두 번째로 집어넣고 필통을 세 번째로 꺼내려던 찰나, 커튼 고리가 촤르륵 쓸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굴러 떨어졌다. 이건 이쪽에 넣고, 얘는 이쪽에… 하며 세상 신중하게 가방 정리를 하는 척하던 나는 내 손에 들린 물건들을 있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고 급하게 자리서 일어났다. 어느새 환복을 끝마친 너는 좀 전엔 옷을 벗고 있던 상태가 원래인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또 처음부터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기고 강의실 문을 나섰다. 아 씨발. 꼭 급할 때 스텝이 꼬인다. 아까는 멀쩡하게 잘만 잠기더니 지금은 버벅대는 가방 지퍼를 어찌할 수가 없어 대강 반만 잠근 채 어깨에 떠메고 나는 너를 따라나섰다.
“야, 너 뭐야.”
다행히 너는 얼마 가지 않았고, 나는 손쉽게 네 손목을 붙잡아 돌릴 수 있었다. 움직이는 조각상 같았던 네가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내 앞에 서 있었고, 호흡하는 네 눈동자에 담긴 나는 꽤 낯설어서 나는 하마터면 내가 너를 왜 붙잡았는지 잊을 뻔했다. 하지만 50분 내내 내가 시달렸던 당혹감은 쉬이 잊을 수 없었고, 나는 그 감정을 모두 담은 한마디를 네게 토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개새끼가 나불거린 말이란.
“누구세요.”
뭐?
“초면에 왜 이러시는데요.”
진짜 미친놈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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