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Egg-and-Spoon race :: 3.2
2020. 2. 22. 18:57*Dancing With Your Ghost_Sasha Sloan
*타씨피(윤겸) 언급이 있습니다.
연애를 종결시키는 것은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가 아니다. 사랑을 시간이 완성시키듯, 이별도 시간으로 완성된다. 끝이 불투명한 여정은 허공을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늘 가득 차 있던 곳이 비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나면 메마른 허공은 커다란 수조가 된다. 비어버린 자리에는 너의 잔상이 새겨진 날들이 서서히 차오르고, 결국 범람한 날들이 내 바짓단을 적시면, 나는 뒤늦게 알아챈다.
내가 마주 해야 하는 것들은 너의 흔적이 아니라, 나의 그리움이었다고.
그때서야 비로소 공백은 '남겨진 공간', 여백이 된다.
Egg-and-Spoon race :: 3.2
_every night i'm dancing with your ghost
눈을 떴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뜬다. 그것은 헤어졌더라도 마찬가지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혹은 내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나에게는 어제의 내일이었던 오늘이 온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태양이 보이진 않았지만.
최한솔이 떠난 지 열흘 째의 날. 그런 이름을 가진 오늘은 하늘이 흐렸다. 커튼을 여나 닫으나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도 여전히 눈이 뻑뻑했다. 무성의하게 인공눈물 반을 털어 넣은 뒤 내려온 거실은 역시나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나는 전등 스위치 대신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반딧불이의 엉덩이 같은 불빛이 거실을 희미하게 밝힌다. 나는 신호등의 초록불 같은 빛에 눈을 고정시킨 채 손만 찬장으로 뻗어 건성으로 더듬거렸다. 그리고 머그잔의 손잡이가 잡혔다, 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웬 요란한 소리가 귀를 날카롭게 갈랐다.
“… 뭐야.”
꽤 큰 소음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놀랐다가 가다듬은 시선에 잡힌 것은 양 모양 양철 인형이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낡고 촌스러운 인형. 이런 조잡한 물건을 어떤 이유로든 집안에 들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최한솔.
네가 미처 챙기지 못했고, 내가 아직 비우지 못한 너의 그림자는 이다지도 하찮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게 내 눈앞을 불쑥 가로막는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한밤중 길목에서 헤드라이트 한 쌍을 마주한 들짐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으면, 실명해 암전한 시야 속에서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한 마디의 생각이 있다.
그냥 내가 더 참을걸.
방둑이, 무너져 내린다.
무릎에 깊숙이 파묻은 고개를 다시 든 건 한참 후였다. 아, 인공눈물 위층에 두고 왔는데. 한껏 뜨거워진 눈가를 습관적으로 누르다 떠오른 생각이 우스워 헛웃음이 샜다. 기껏 진짜는 다 뱉어놓고 눈 아프다고 가짜를 넣는 건 대체 무슨 유형의 바보인지. 요즈음 내 일상이 이렇다. 눈이 아플 만큼 울다가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소리만 뱉다가, 그 마저도 숨이 차서 못하면 멍청한 돌처럼 앉아 있다 가짜 눈물을 눈에 부어 넣는다. 이럴 거면 울지를 말든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꼴이, 영락없는 콩쥐다.
“… 눈 아파….”
신기한 점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렇게 우는데도 다음 날이 되면 또 흘릴 눈물이 있다는 점이었다. 인공눈물 덕인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처럼 울었더니 정말로 텅 비어 버린 건지 머저리 같은 생각만 난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야, 김민규!”
어둑하게 먹구름이 잔뜩 낀 거실에 갑자기 천둥 같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거세게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소리는, 정한이 형이었다.
“야―! 문 열어!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쾅쾅, 쾅쾅쾅, 불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는 소리가 매섭고 다급하다. 하지만 나는 무릎만 더더욱 더 가까이 바짝 끌어안았다.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거울 속 나 자신도 마주하기 어려웠다. 없는 척 잠자코 있으면 포기하고 가겠지. 하지만 형은 언제나 나보다 한 발짝 위였다.
“너 거기 숨어 있는 거 다 보이거든? 빨리 문 열어.”
대꾸가 없으니 아예 거실 유리창 앞으로 걸어와 창에 손을 대고 안을 살펴보던 정한이 형은 금세 쭈그려 앉은 나를 발견하고 문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열라고 소리쳤다. 없는 척도 글러 먹었으니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녹슨 우산을 펼치듯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당장 뭐라도 부수고 들어올 것처럼 굴던 형은 막상 문이 열리고 내 얼굴을 보더니 말이 없어졌다. 대신 한숨만 한 번 내쉬더니 나를 밀어내고 집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불 켜지 마.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형에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고작 그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계단 옆 스위치부터 눌렀지만.
“…….”
“…….”
“… 왜. 할 말 있으면 해.”
“뭐 좀 먹긴 했어?”
한참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스위치란 스위치는 있는 대로 누르고 다니던 형은 더 이상 켤 불이 없는 걸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러고 다니는 형을 말릴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형이 계단 옆 스위치를 눌러 거실 등을 켰을 때부터 소파에 누워 팔로 눈만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들려온 말에는 팔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저었다. 재차 들려오는 한숨이 깊다.
형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내가 최한솔과 헤어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을 지금 알았을 리도 없고, 안다고 해서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찾아올 사람도 아니었다, 정한이 형은. 그렇다면 무언가 일이 벌어지긴 했다는 건데, 그 일이 무엇인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까 너무 울어서 그런 지도 모른다. 채운 것도 없는데 비우기만 하니까. 그리고 형은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내 빈 속부터 걱정했다.
“그래도 뭔가 좀 먹지 그랬어. 아니면 시키기라도 하지.”
“싫어. 들어가지도 않아. 그리고 어디 먹으면 먹는 게 먹는 거로만 끝나? 치우는 건 또 누가 치우고, 시키면 사람 봐야 되고.”
“… 그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냐.”
“뭐래. 무슨 말하러 와 놓고.”
“됐어. 너 기운 좀 차리면 하든가. 아니면 네가 알아서 눈치채든가 하겠지.”
“뭔데. 걍 말해.”
“듣고 쓰러지면 나보고 119 부르라고?”
“최한솔 얘기잖아.”
“…….”
“그냥 해. 상관없어.”
“퍽도.”
“진짜야. 뭔ㄷ―”
“한솔이 사라졌어.”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아무 얘기도 오가지 않았다. 형은 내가 진짜 기절이라도 할 줄 알았는지 내심 유심하게 살피는 눈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소식이 전혀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걔 답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게 전부였다.
“… 번호 바꿨어?”
“안 놀라?”
“놀라야 되는 거야?”
“아예 사라졌다니까? 어디로 갔는지 몰라. 번호도 없어. 바꾼 건지 뭔 지도 모르겠고, 그냥 없어.”
“집은?”
“없어. 걔 아직 집 못 구했잖아. 일단 펜션 같은 곳에 장기 투숙 예약한 것 같던데, 거기도 없었어.”
“… 죽을 애는 아니야. 걱정 마.”
“야, 너는―”
“내가 알아.”
내 말에 형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뱉은 말의 모순이 웃겼다.
그래, 나는 말 그대로 너를 잘 알았다. 아는 만큼 몰랐을 뿐.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오래 사귈수록 더 모를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헤어졌는데, 그래 놓고 네가 이런 일로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잘 안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웃겼다.
우리가 연애를 하긴 했나 보다, 한솔아. 멍한 머리로 하고 있던 시답잖은 감상을 끊은 것은 정한이 형이었다.
“언제 헤어졌어.”
“걔가 말 안 했어?”
“연락 오긴 왔지. 근데 지금 너 상태 보니까 그때 헤어진 거 아닌 것 같은데.”
“언제 연락했는데?”
“삼일 전인가.”
“얼마 안 됐네.”
“울더라.”
말을 못 하더라고. 한 한 시간 정도는 계속 울기만 했던 것 같은데. 대충 알긴 알겠어서 안 물어보고 있으니까 겨우 말하더라. 헤어졌다고. 담담히 이어지는 정한이 형의 말을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형이 전해주는 너는 아직 낯설기보단 익숙함이 컸다. 네가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마저 익숙했다.
“… 열흘쯤 됐어. 헤어진 지.”
“장마 아니랬잖아.”
“아니었어.”
“근데 왜 헤어졌어.”
“장마가 아니면 비가 안 와?”
“… 말이라도 하지 그랬냐.”
“말하면?”
“…….”
“그게 누구한테 말한다고 해결될 문제면 진작 말했겠죠.”
내 문제였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확실히 와 닿는다. 내 말대로 이건 내 문제였다. 너와 나, 우리 중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너의 방식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만 그게 전부였던, 나의 문제. 그러니까 한솔아.
너는 울지 않아도 괜찮은데.
“… 이제 불 좀 꺼 주라, 형.”
나 눈이 너무 아파. 여전히 눈 위에는 왼팔을 얹은 채로 입술만 달싹이자 부스럭 옷깃 스치는 소리와 소파 소리, 그리고 그보다 미약한 숨소리가 귓바퀴를 훑었다. 정한이 형의 세 번째 한숨이었다.
최한솔이 떠나간 날부터 내가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3일 정도는 별 느낌이 없었다. 이게 뭐가 뭔지, 우리 사이에 정말 변화가 생기긴 한 건지. 출근도 평소처럼 했다. 너랑 헤어졌다는 사실을 잊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가끔, 회사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혹은 주황 불에 급정거를 하다가, 저녁에 마실 술과 안주거리를 사다가, 문득 떠올랐다. 아 맞다, 우리 헤어졌지. 깜박 잊었던 일정이 생각나듯, 그렇게 떠올랐다, 너와의 헤어짐은.
그게 못 견딜 일이 된 날은 우리가 헤어진 지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던 어느 새벽 한 중턱이었다.
그 날은 좀 더웠고, 꿉꿉했다. 한 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내가 잠을 설칠 정도였으니까. 에어컨, 켜야겠다. 졸음에 젖은 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침대를 아무렇게나 더듬거렸다. 그리고, 내 손끝에 걸리는 것은 에어컨 리모컨이 아닌, 유달리 너른 침대의 이불보였다.
너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기 때문에 네가 없는 침대는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너에게 전화를 걸 수 없는 새벽은, 나에게 낯설다 못해 무서운 것이었다.
“…….”
바로 그 순간, 소름 끼치는 현실감이 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가로질렀다. 느른하게 몸을 누르던 잠 기운이 깨끗하게 걷혔다. 누가 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상체가 벌떡 섰다.
최한솔. 최한솔이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더워서 잠까지 설쳤는데 지금은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어깨를 감싸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최한솔은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옅은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나는 외로워졌다. 사무치게.
그 시각을 기점으로 내 일상은 비틀리기 시작했다.
“좀 괜찮아?”
흐릿한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을 때는 방 안이 어둡다 못해 컴컴한 시각이었다. 부엌 전등만 약하게 켜 놓고 있던 정한이 형이 내 인기척을 들은 건지 물 한 컵을 들고 다가왔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컵을 받았다.
“… 왜, 아, 목소리… 왜 안 가고 있었어.”
“이런 애를 두고 어떻게 가냐. 석민이한테도 일단 혹시 몰라서 늦게 간다고 전화했어.”
“… 고맙네. 저녁은?”
“너 깨면 뭐라도 먹이려고 아직.”
“난 괜찮은데…”
“그러다 실려 가고 싶냐? 잔말 말고 이 근처 식당 뭐가 맛있는지나 불어.”
난 이쪽 근처 잘 모르니까. 바짝 마른 입술을 물로 조금 축이고 있으니 형은 곧바로 배달을 할 심산인지 폰을 들었다. 난 아무거나 해 줘. 이 근처 식당 웬만해선 괜찮아. 그냥 형 먹고 싶은 거 시켜. 아, 목소리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네. 큼큼, 헛기침을 하며 영 맛이 간 게 확실해 보이는 목을 가다듬고 있으니 모른 척 폰을 보던 형이 물어온다.
“그래서, 말 안 해 줄 거야?”
“뭐를?”
“무슨 일 있었는지.”
글쎄. 여기에 말할 만한 서사가 있는 지도 난 이제 모르겠어, 형. 나는 대답 없이 물과 문장 덩어리를 삼킨다.
“40분 걸린대. 백반.”
재미없는 말 몇 마디, 혹은 정적, 그것도 아니면 잠이 놓였던 형과 나 사이에는 이제 빈 플라스틱 그릇들이 쌓여 있었다. 형은 고맙게도 따로 죽을 시켜 주었다. 그래 봤자 그것도 얼마 먹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고마웠다. 가만히 모로 누워 숨만 내뱉던 나는 몇 입 대지 않고 뚜껑을 닫았던 죽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 한솔이는 싸울 때마다 자기가 왜 나한테 미안한지 그 이유를 1부터 100까지 들고 왔어.”
“… 걔 답네.”
“그리고 난… 그게 죽기보다 싫었어.”
나는 그게 죽기보다 싫었어… 너도 모르는 얘기가 새어 나온다.
“너무… 정말 너무 싫었어. 걔가 그렇게 미안해하는 게 싫었던 것도 있지만, 걔가 그렇게 들고 온 이유에는… 내 과거가 너무 많았어. 걔는 연어처럼 그걸 다 거슬러 올라가서 예전에 했던 잘못까지 나한테 거듭 사과하고 싶어 했거든? 하지만 걔는 몰랐던 거야. 그러면 걔만 과거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는 걸….”
걔랑 싸울 때마다 나는 구질구질한 나를 봐야 했어. 사실 싸운다는 게 그렇잖아. 어떻게 누구 한쪽만 잘못을 해. 거기엔 분명 내가 억지 부린 것도 있었을 텐데, 걔는 그것도 다 지가 미안하대. 웃기지. 진짜 웃긴 애야. 그러니까 걔가 하는 사과는 나한테는 사과가 아니라―
“내 과오의 서사였어.”
“…….”
“무슨 느낌인지… 이해가 가, 형?”
내가 늘어놓은 말은 정말 이해를 바라서 한 말이라기보단 그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형도 그걸 아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손끝에 닿는 죽 그릇의 표면이 아직 미적지근하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든가, 그런 생각은 안 해?”
나는 최한솔을 사랑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한다. 최한솔이 그러하듯. 하지만 사랑만 가지고 용기 낼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 형. 내가 걔랑 사귀면서 진짜 외로웠던 적이 있는데, 그게 언제인지 알아?”
“모르지.”
“걔랑 사귄 지 3년쯤 됐을 때인가. 북촌 있지, 거기서 데이트를 하고 집에 가려고 주차해놓은 곳으로 가는 길이었어.”
“응.”
“근데 갑자기 비가 엄청 오는 거야. 소나기였겠지만, 꽤 심한 소나기였어.”
납작한 돌들이 깔린 골목길, 야트막한 담장들, 구부러진 기와, 그리고 그 위를 통통 튀는 물방울에 젖고 있는 우리.
“… 그래서 엄청 급하게 피했지. 피하고 보니까 다행히 맞은편 좀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더라고? 보더니 자기가 우산을 사 오겠대.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어.”
“근데 있잖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사 오더라, 우산을.”
“…….”
“나는 그게… 그렇게 서글펐어.”
차가 있는 곳까지는 채 200미터도 남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까지 우리는, 따로 우산을 쓰고 각자의 빗속을 걸었다. 내가 걷는 길에는, 나에게만 비가 내렸다.
“형.”
“…….”
“걔가 그런 걸 알아들을까? 그런 평범한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난… 나는… 자신이 없어….”
툭, 투둑. 내내 흐리던 하늘은 결국 빗줄기를 토해내는 모양이었다. 창틀을 두드리며 내려가는 물방울 소리가 정한이 형과 나 사이를 메웠다.
정한이 형은 그러고도 두 시간 정도를 더 있었다. 밥 거르지 말고. 알겠어. 우산은 다음번에 줄게.
“그래. 한솔이는… 너무 걱정 마. 걔가 자기 할 일 무시하고 그럴 애는 아니니까, 곧 연락이 되든가, 하겠지. 안 돼도 형들 결혼식은 올 거니까―”
“넌?”
“어?”
“너는. 결혼식 어쩔 거냐고.”
나는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힘 빠진 웃음을 웃었다.
가야지. 형 결혼식인데.
혼자 자기에 넓은 침대는 이제 익숙하다. 침대의 빈자리를 메우는 외로움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나는 그 틈새로 몸을 뉘인다. 침대 옆 조명을 끄기 전, 나는 폰을 들어 메신저를 켰다. 아직 내리지 못하고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채팅창과 네 이름 대신 박혀 있는 네 글자가 눈에 박혔다.
알 수 없음.
비어 있는 프로필 사진과 뜨지 않는 이름. 가슴이 철렁할 법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어쩐지, 지금 이 상태야말로 진짜 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는 어디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여행 계획은 짠 걸까. 아니면 이미 떠나버렸을까.
나를, 그리워할까.
너의 잔상은 매일 영화처럼 집안 곳곳에서 재생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기 어렵다. 늘 그래 왔듯이.
조명을 껐다. 결혼식은 한 달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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