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화양연화(花樣年華) 02.
2020. 2. 11. 01:1602.
뒤쪽 귀퉁이가 거뭇하게 썩어 뚝 부러져 있는 나무 조리(ぞうり) 슬리퍼와 구정물로 얼룩져 새까만 발바닥 한 쌍이 문지방을 넘어섰다. 정체모를 오물이 가득 묻은 발은 어두운 상아색의 타일 위에 까만 거미줄 같은 발자국을 찍어냈다. 자신의 영역에 타인이 남긴 땟국이 불쾌할 법도 했으나 한솔은 아침에 제 욕실에서 튀어나온 쥐새끼를 볼 때보다 흥미 없는 눈길로 그의 흔적을 보고는 책상께로 다가갔다.
책상의 오른쪽 뒷다리 옆에는 한솔의 무릎 높이까지 오는 대나무 석작이 놓여있었다. 보통의 석작에 비해 유달리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는 정육면체는 구룡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치고 표면이 반질반질 윤이 도는 게 아직 퍽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한솔 구역의 단골고객이자 윗집에서 치과를 운영하던 방 씨가 재작년 구룡을 떠나면서 그에게 남기고 간 것이었다. 한솔은 새벽 세 시에 허옇게 빛나던 방 씨의 이빨을 기억했다.
어느 날 깊은 새벽, 황 씨의 생선 대가리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방 씨는 한솔의 문을 두드렸다. 꿍꿍꿍, 낮게 벽을 울리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한솔이 문을 열자 그 앞에는 거대하게 뚤뚤 말린 봇짐을 등에 들쳐 맨 인간이 벙글벙글한 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구룡은 한낮이 바깥의 자정보다 깜깜한 곳이었다. 그 정도로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잠과 어둠에 묻혀 흐린 시야로 새벽 세 시에 다짜고짜 찾아온 인물의 신원을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곧장 대가리를 날려버릴 심산으로 문 옆에 걸린 권총 손잡이를 막 감아 쥐려던 순간, 땅딸막한 몸집에 반만 한 나무 상자가 다짜고짜 한솔 앞에 들이밀어지었다.
그제야 한솔은 제 앞의 똥똥한 항아리 단지 같이 생긴 희미한 인영이 윗집의 방 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 가슴팍에 겨우 머리가 닿을만치 똥짤막한 인물이 한솔을 올려봤으나 시커먼 공간에서 겨우 보이는 것은 쩍 벌어진 입술 새로 번쩍번쩍 빛나는 허연 이빨들뿐이었다.
단단하고 반듯해 보이는 걸 보니 그의 실력은 아닐 것이다. 몇 주 전 그에게 외상값 대신으로 치료받았던 충치가 괜스레 쿡쿡 쑤시는 기분을 느끼며 한솔은 권총에서 손을 스륵 미끄러뜨렸다. 여기 들어오기 전 직물 가게를 운영했던 실력을 살려 짠 것이니 몇 년은 튼튼할 것이라, 대나무도 이 근방에서 구하기 어려운 아주 비싸고 좋은 나무를 썼다면서 방 씨는 소곤소곤 커다란 석작을 소개했다.
한솔은 말없이 석작을 받아 들었다. 매끌하고 차가운 대나무 결이 손끝에 스쳤다. 방 씨는 한솔의 침묵을 수락으로 해석했는지 허연 이빨을 더욱 드러냈다. 입을 쨀 것처럼 벙글벙글 웃으면서 방 씨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리고 찰박이는 걸음 소리가 정확히 세 번 복도를 울렸을 때, 방 씨의 발목에는 한솔의 총알이 박혔다.
타앙 ―!
단발의 요란한 소리에 뒤를 이어 아아악―! 하는 비명이 쩌렁하게 복도를 울렸으나 문을 열어보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누구 하나 부스럭거리는 인기척도 내지 않았다. 구룡은 그런 곳이었다. 한솔은 신음하고 있는 살덩어리에게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이제 어둠에 완벽히 적응된 눈은 불룩한 배 덕분에 몸을 구부려 구멍 난 발목을 잡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만 내뱉고 있는 방 씨를 시야에 담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져 다부진 손이 방 씨 등 뒤에 봇짐을 고정시켜놓은 끈을 홱 잡아챘다. 방 씨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마주할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팔을 버둥거렸으나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는 끈이 잡아당겨지자 그 꼴은 이미 뒷다리가 떨어진 맹꽁이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스윽―, 슥, 질척거리는 땅바닥에 사람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음산했다. 한솔은 쉬지 않고 방 씨를 묵묵히 끌었고, 이내 경계에 당도했다. 쾅쾅쾅, 사무실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아재. 외상값 왔어.”
방 씨가 한솔에게 석작을 주기로 결심한 것은 꽤나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구역 배달원들 중 석작의 값을 쳐 줘 외상을 대신 갚아줄 사람은 한솔뿐이었으니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방 씨의 신장은 이미 두 개 전부 바깥 세상으로 나와 스테인리스 쟁반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석작이라도 한솔에게 쥐어준 덕에 방 씨는 신장 하나와 약지 두 개, 오른손 소지 하나만 내놓고도 – 그는 왼손잡이였다. 이 얼마나 친절한지! – 구룡을 떠날 수 있었다. 심지어 한솔은 발목에 박힌 총알도 빼주었다. 아저씨 운 좋네요. 한솔은 발목에 붕대를 감아주며 마취약에 취해있는 방 씨에게 웃어주었다.
석작은 그렇게 한솔의 가구가 되었다.
한솔은 네모난 뚜껑을 열었다. 뚜껑의 귀퉁이에 왼쪽 엄지손가락 지문 모양으로 염색된 검붉은 핏자국이 그 날을 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집에 몸을 들이게 된 새로운 가구의 쓰임새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들여놓고 보니 생각보다 더 큼지막했던 대나무 상자는 좋은 나무를 썼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훌륭한 약품 보관함이 되어 주었다. 상자 안에 그득이 들어찬 갖가지 약들을 내려다보던 한솔이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까무잡잡한 남자는 어느새 제가 집주인인양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를 잠시간 응시하던 한솔이 무심한 물음을 던졌다.
“너 주로 뭐 하는데?”
“뭘?”
“약. 뭐 하냐고.”
음. 한솔의 질문에 남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기억을 더듬는지 살짝 찡그려진 미간이 퍽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몰라.”
“몰라?”
“그냥 뒷치기하다가 무슨 가루 같은 걸 내 코에 막 비비던데.”
이렇게. 그는 그때 손님이 했던 모양새를 흉내내며 코 아래에 검지를 비벼 보였다. 한솔은 그때의 상황을 넉넉히 짐작했다.
“그게 다야?”
“뭐가?”
“그렇게 한 게 다냐고. 한 번?”
“아, 어. 그게 처음.”
한솔은 열었던 뚜껑을 느릿하게 닫았다.
“그럼 굳이 왜 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인지 개를 닮은 남자는 귀를 한번 쫑긋 당겼다 놓았다.
“그거 하니까 섹스가 조금은 기분 좋던데?”
“그 새끼 마감 손님이었지?”
“뭐야. 어떻게 알았어.”
코카인. 한솔은 그가 무엇을 흡입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코카인은 환각용이라기 보단 각성용이었다. 술에 절었다가도 코카인을 들이마시면 당장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뇌에서 불이 일었다. 한 마디로 그에게 코카인을 먹인 이유는 정신 차리고 보조 맞추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마감 타임에는 지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나저나 코카인 비싼데 남창한테까지 그거 먹여가면서 할 정도면 상습범이네. 돈 많은 놈인가. 털까. 그러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간의 집을 휘저어 자루에 돈을 쓸어 담는 상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뭐 해? 그래서, 달라니까? 가루.”
“그니까 뭣하러?”
“일하게.”
“일은―,”
“기왕 하는 거 좀 덜 좆같이 해도 되잖아, 나도.”
무어라 답할 틈도 없이 이어진 말에 한솔의 입이 벌려진 채로 멈췄다. 한솔의 말문을 막은 눈동자가 고왔다.
“… 코카인은 환각용이 아니라서 그런 용도로는 못 써.”
“그럼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는 걸 줘.”
“너 얼마나 낼 수 있는데?”
“나, 음.”
남자는 미간을 한 번 더 찌푸리고 눈을 굴렸다. 동그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굴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혀 딱 소리를 내며 한솔을 바라봤다.
“아! 매트리스! 일단 그거부터 줄게. 우리네는 다른 건 몰라도 매트리스들은 다 짱짱하단 말야.”
“필요 없는데.”
“야. 그런 거 여기서 구하기 힘들어. 존나 귀한 거야.”
“상관 없어. 나한테 필요가 없으니까.”
“어째서? 지금도 난 엉덩이 아파 죽겠구만.”
“난 그게 편해.”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갖고 올래. 어차피 당분간은 여기 자주 올 것 같고.”
한솔의 미간에 얕은 언덕이 섰다.
“내가… 이름도 모르는 남창의 휴게실이 되어준다고 말한 적은 없지 않아?”
“민규.”
“뭐?”
“김민규. 내 이름, 이제 아네.”
“야.”
“선금은 매트리스. 후불은 약 받고 할래. 그럼 내일 매트리스 갖고 올 테니까 준비해 놔.”
민규는 막무가내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민규가 지나간 길에는 또다시 까만 거미줄이 남았다. 이웃 남창의 이름과 매트리스에 더불어 한솔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그때가 오후 12시 34분이었다.
한솔의 다음 배달은 5시였다.
민규보다 먼저 도착한 매트리스가 한솔의 아침을 두드렸다. 한 뼘 정도의 두툼한 두께의 매트리스는 투둥, 하는 소리를 내며 한솔의 나무 침대에 놓였고, 배달을 온 남자는 퉁퉁하고 털이 수북한 손으로 한솔의 침대에 매트리스를 고정시켜준 뒤 의례적인 인사 한 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한솔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첫 번째, 매트리스의 높이가 너무 높았다. 본디 한솔의 침대는 발을 내리면 곧바로 슬리퍼가 닿는 높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침대가 너무 높아져버려 잠을 청할 때 낙사(落死)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총 맞아 죽거나 칼에 찔려 죽는 건 몰라도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뒤지는 건 너무 볼품없잖아. 한솔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둘째는 매트리스 다음에 이어서 올 인물 때문이었다. 김민규.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원치 않게 뇌리에 새겨야만 했던 이름이었다. 어제 민규가 남기고 간 까만 거미줄 모양의 발자국은 슬리퍼에 쓸려 뭉그러진 지 오래였다. 한솔은 9시까지 첫 번째 배달을 완료해야 했고, 지금은 8시였다. 배달해야 하는 물량은 열 두 박스. 그리고 지금 한솔은 세 박스를 남겨두고 있었다. 포장만 해서 배달을 끝마치기도 꽤 빠듯한 시간이었다. 민규는 언제 올지 몰랐다. 제 침대 위에 얹힌 물체를 침입자 바라보듯 빤히 노려보던 한솔은 일단 포장을 재개했다. 오늘 중으로 오겠지. 괜한 사람 때문에 배달에 차질이 생길 순 없었다.
라디오는 다시 돌아갔다.
민규가 한솔을 찾은 시각은 첫 배달이 끝나고 3시간 뒤, 두 번째 배달 마감 시각이 한 시간 반 남은 때였다. 라디오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am이 pm으로 떨어지고 빨간 계기판에 12라는 숫자가 새겨지던 순간, 민규는 한솔의 집 문을 두드렸다.
“나야. 문 열어.”
고작 어제 봤다고 익숙해진 목소리에 한솔은 원통형 초콜릿 통 안에 알약을 채워 넣다 말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복도를 등지고 문 앞에 서 있는 민규는 속옷만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을 뿐, 어제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한솔은 살짝 비켜섰다.
“들어와.”
하루 봤다고 익숙해진 것은 저뿐만이 아닌지 민규는 자연스레 침대로 다가갔다.
“대박. 매트리스 잘 받았네?”
“어.”
“그래― 이게 침대지―!”
매트리스 위에 앉은 민규의 발은 어제와 같이 땅에 닿았다. 키 큰 건 알았지만 어지간히도 크네. 민규의 발톱 새 거무튀튀하게 끼인 흙먼지들에 시선을 두던 한솔은 매트리스를 엉덩이로 퉁겨보고 있는 민규에게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돈은?”
“약 종류를 알아야 맞게 주지.”
“야. 너 돈 없지?”
“지랄. 이 층에서 내가 제일 부자일 걸.”
아니다, 이 구역? 요게 또 은근 쓸 만한 물건이라. 그렇게 말하며 민규는 살짝 든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 쳤다. 한솔은 아무 대꾸 없이 책상 위 구석에 두었던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사탕 통을 민규에게 툭 던졌다. 민규는 곧잘 받았다.
“MDMA.”
“엠… 뭐?”
“약 이름. 알약이고, 씹어 먹어도 되고 그냥 삼켜도 돼. 빻아서 가루로 하든가, 뭐, 그건 재량껏. 근데 코카인처럼 코로 마시는 건 하지마. 코 점막 얼마 안 가서 다 좆 돼. 그리고―”
“뭐에 좋은데?”
한솔은 민규를 빤히 바라봤다. 민규의 눈은 오늘도 무해하게 고왔다.
“섹스.”
그 날 밤 한솔은 잠을 설쳤다. 매트리스가 낯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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