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화양연화(花樣年華) 05. (-19)
2020. 2. 26. 17:0505.
차곡차곡 쌓인 모래알들이 백사장에 구른다. 차르륵차르륵, 모래알 구르는 소리가 울리면 파도가 쏴아아, 밀려온다. 밀려온 파도는 백사장에 흔적을 남기고 밀려간다. 모래알은 다시 구른다. 파도와 백사장은 그렇게 끝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모래알 사이 틈으로 짠내 나는 물이 스미고, 백사장은 어느새 파도를 간직한다.
나는 너에게 젖는다.
‘…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돌의 열기에 숨쉬기도 벅찼다. 레몽과 마송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에다가, 한 때 같이 산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물가로 가서 바다를 따라 걸었다. 간혹 잔파도가 깊숙이 밀려와 우리 캔버스화를 적셨다…’
책을 덮었다. 민규는 그 뒤로 3일 간 오지 않고 있었다. 서운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개운하지도 않았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겼을 때 주는 존재감은 단기적이다. 그러나 존재하던 것의 부재는 본래 그 존재의 덩치보다 더 큰 구멍을 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허전함은 자각하는 순간 상실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한솔은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한솔은 창문에 다가섰다. 물론 창문의 본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였다. 처음 이 집에 몸을 들였을 때, 오 씨는 그랬다. 너는 운 좋은 줄 알아야 돼. 창으로 볕 드는 방이 이 동네에서 몇 개 되는 줄 아냐. 너 오기 직전에 딱 맞춰서 여기 영감이 뒤져부렀다니까.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한솔은 그런 운 같은 것이 아무 쓸모없었음을 깨달았다. 방은 모든 것을 다 갖추기에는 너무 좁았고, 그 탓에 옷장을 도저히 넣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옷장을 채울 옷도 몇 벌 없었으나 방에는 작은 궤짝 하나 더 넣을 공간도 없었다. 그러자 오 씨는 방을 가로지르는 철봉을 천장에 가까운 높이로 창문 위쪽에 하나 박아 주었다. 그게 한솔의 옷장이자 커튼이었다.
옷가지들 소매를 훑어가던 손끝이 한 곳에서 멈췄다. 검지에 닿아오는 뻣뻣한 감촉이 익숙지 않았다. 천천히 옷의 소매를 타고 올라간 손이 그보다 더 느리게 옷걸이를 빼냈다.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잠겼다. 재킷을 입기 전, 넥타이를 매기 위해 욕실에 들어섰다. 흐린 거울의 더러운 얼룩들은 이제 지지도 않는 얼룩이었다. 더러워진 곳을 피해 오물들 사이사이로 애써 비춰가며 겨우 넥타이를 맸다. 그렇지 않아도 자주 매는 것이 아니라 매번 헷갈리는데 잘 보이지도 않으니 더 오래 걸렸다.
집을 나서기 전 한솔은 재킷 바깥쪽을 쓸어내려 안주머니의 내용물이 제대로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문을 닫았다. 뚜벅, 뚜벅. 평소처럼 스윽, 척, 하고 끌리는 슬리퍼 소리 대신 둔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낯설어 귓구멍이 간지럽기도 했다.
몇 걸음 걷다 보니 경계였다. 슬리퍼를 신었을 때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솔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은 금방 열리지 않았다.
“언놈이 아침부터―… 아, 솔이냐.”
잠이 덜 깼는지 부스스하고 험상궂은 얼굴이 문틈으로 나왔다가 문 밖의 인물을 확인하고 풀어졌다. 한솔은 고갤 까딱였다.
“어. 가려고.”
“… 그래. 잘 다녀와라. 내 인사도 전해주고.”
“어느 쪽에?”
“당연히 둘 다지, 새꺄.”
나중에 보자. 빙긋이 입꼬리를 올리며 한솔이 던진 농담 아닌 농담에 오 씨는 멍청한 소리를 말라는 듯 장난스러운 호통을 치고 배웅했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오 씨가 사라지자 돌아선 시야에 불 꺼진 미홍이 들어와 한솔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나의 일터 맞은편에 문이 굳게 닫힌 채 자리한 너의 일터는 낮밤이 뒤바뀐 곳이었다. 비단 미홍뿐만이 아니라 이 복도의 대부분이 그랬으나 이곳만큼 완전히 빛과 어둠이 전복된 곳은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한솔은 발소리를 죽여 미홍 전면의 큰 유리창에 다가섰다.
“…….”
내부는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어 살펴봐도 보이는 것은 의자 두세 개와 그 뒤로 내부를 볼 수 없게 내려진 블라인드가 다였다. 시간이 흘러 조용히 어둠이 깔리면 너도 여기, 내리쬐는 붉은빛을 맞으며 앉아 있는 걸까. 일하는 너는 본 적이 없었다. 배달을 마치면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니 볼 일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너를 보기 전, 아주 예전에, 밤 시간의 미홍을 본 적이 있다. 거의 헐벗은 여자와 남자들이 민무늬의 블라인드를 등진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 전부지만 그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목적을 잃어버려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이 허공에 붙박인 공허한 눈동자. 거기에 짙은 화장이 더해져 어딘가 기괴한 느낌마저 주는 표정들은, 적어도 산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붉은 조명 아래 피부가 분홍빛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앉아 있지 않았다. 진열되어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한 여자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고, 한솔은 마주했던 두꺼운 가면 같은 얼굴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던 기분을 기억한다. 너도 그렇게 앉아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 나는 조금 슬플 것 같다고, 한솔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은 지난번과 또 달랐다. 시간의 흐름이 웅덩이에 고여 썩어 가는 곳에서 나와 서면, 확연히 다른 시간 단위가 피부에 생생히 닿아왔다. 이곳의 하루는 구룡의 1분이었다. 길 건너편에서는 어느샌가 신축된 건물이 우람한 몸집을 뽐내고 있었다. 흥미 없는 눈길로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라보던 한솔이 이내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모든 것이었다.
배차 간격이 그리 길지 않아 한솔은 금방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광은 무의미한 현실이었다. 조이트로프의 원통 바깥쪽 틈새로 애니메이션을 엿보듯 관조의 눈길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면 버스는 금세 한솔을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기에 굳이 불필요한 감상에 빠질 틈이 없기도 했다. 한솔은 천천히 시설 안으로 들어섰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혀 내는 둔탁한 소리가 쨍하게 건물 전체에 울렸다. 평소에도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던 납골당은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더욱 인적이 없어 작은 소리도 유독 크게 울렸다.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가 마지막 칸에 도달한 한솔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왔어요.”
가장 안쪽,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층 구석에, 한솔이 찾던 사람이 있었다.
“뭐, 별 일 없죠? 나도 없어요.”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한솔은 익숙하게 주절주절 말을 풀어냈다.
“날이 바뀌는 걸 매일 아침 의식해야 돼요. 안 그러면 오늘이 어제인지, 어제가 내일 인지도 요새는 헷갈려서. 어떻게든 이 날은 안 까먹긴 하는데, 아무튼.”
“… 아재가 인사 전해 달래. 그 사람 새장가요? 글렀어요. 돈 모은다더니 요샌 비둘기 도박에 빠져가지고. 심심하면 나한테 물어보는 게 날개가 큰 비둘기가 빨리 날까, 어린놈이 빨리 날까 이딴 거밖에 없다니까. 그래서 팽 마담이 잔소리는 하는 모양이던데―, 근데 그 할매도 엄청 닦아세우진 않는 거 보면, 둘 다 결혼은 좀, 부담인가 봐요.”
“이젠 좀 덥더라. 뭐 그래도 나는 괜찮아요. 애초에 더위도 별로 안 타고. 거기가 또 워낙… 찜통인가. 살다보니 살아지더라고. 아프리카에도 사람 사는데요, 뭐.”
한솔은 분명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과묵한 유형도 아니었으나, 그의 입에서 필요 없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아마 일 년 치 한솔의 말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한솔은, 그 얘기를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건조한 입술이 머뭇거림을 그대로 나타내듯 두어 번 달싹거리다 다물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약간의 겸연쩍음과 결심을 담은 입술이 열렸다.
“… 그… 뭐냐. 이걸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네. 새 고객이 생겼는데, 나보다 한 살 많아요. 그, 팽 마담 네서 일 하고. 근데, 좀 친해졌어요. 아니다, 안 친한가? 이게 친한 건가? 그냥, 좀 귀찮게 굴어요, 그 형이. 자꾸 막 찾아와서 말 걸고. 근데 뭐 싫―”
싫은 건 아니고요,라고 말 하려던 한솔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한솔은 괜히 아무도 없는 복도를 흘긋 돌아봤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안주머니에 챙겨 왔던 작은 비닐을 꺼내 들었다.
“…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요. 암튼 좀 귀찮아. 자요, 이거. 이거 먹고.”
그는 제가 일전에 붙여놓았던 비닐을 떼고 새로 들고 온 봉투를 붙였다.
“돈 모으면 위층으로 이사시켜준다고 했는데, 그건 좀 늦어질 거 같아요. 요새 여기 말고도 묫자리 잡기 힘들다고 말 많잖아요. 알죠? 그래서 자릿값이 또 올라서. 여기라도 있어서 다행인 정도라니까… 미안해요. 이해하죠?”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한솔이 엉덩이께를 한 번 툭툭 털었다. 새 사탕 다 먹을 때까진 한번 힘써볼게. 그럼,
“갈게요, 엄마.”
조용한 복도에 구둣발 소리가 다시 차분히 울렸다.
대낮에 마주한 지하계단 입구는 그저 시커멓기만 해 얼핏 보면 동굴 입구와 같았다. 밝은 곳에 익숙해져 있던 시야로 작은 등조차 하나 달려있지 않은 곳에 들어서니 윤곽은커녕,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한솔은 난간에 손 한번 대지 않고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둣발 소리가 흐트러짐 없이 계단을 울렸다.
이어 두 층 정도를 쉼 없이 내려간 한솔이 어느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능숙한 손길이 문 옆에 늘어뜨려져 있는 가느다란 철사 줄을 잡아당겼다. 이내 문 내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칠월의 개구리는.
“19월 하지의 동백을 먹고 달을 뱉는다.”
한솔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문 뒤에 서 있던 거구의 남자가 길을 비켜서자, 붉은 벨벳 재질의 바닥재로 도배된 복도로 한솔은 발을 내디뎠다. 벽부터 천장까지 온통 검붉은 색의 통로는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서야 섣불리 발을 들이기 힘든 느낌이었다. 게다가 천장에 일렬로 박힌 조명에서 나오는 빛은 썩 밝지 않아 기괴한 분위기를 더했다. 하지만 한솔은 계단을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일정하고, 어쩌면 평온하기까지 한 걸음으로 복도를 나아갔다. 한참을 똑바로 걷다가 좌회전. 그리고 다시 직진. 한참 바삐 움직이던 한솔의 발은 매끈하게 페인트가 발린 웬 커다란 나무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묵묵히 한솔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던 한 남자가 문을 두들겼다.
“보스, 한솔님 왔습니다.”
- 들어와.
잠깐의 간격 뒤에 적당한 울림이 있는 깔끔한 목소리가 입장을 허가했다. 한솔의 뒤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남자가 길이 든 손길로 문손잡이를 돌렸고, 한솔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 채 긴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있던 여자가 생긋, 웃었다.
“왔냐, 아들.”
옷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천 쪼가리만 걸친 남자의 엉덩이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고 진득하게 머무르는 하얀 손에 아주 잠깐 눈길을 두었던 한솔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여자는 남자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고, 한솔은 반듯하게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새하얀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각진 철제 케이스를 꺼내 한솔과 그 사이에 자리한 탁자에 던지듯 내려두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떨어지며 뚜껑이 열렸고, 그 안에 가지런하게 늘어진 담배 개비들 중 하나를 한솔은 꺼내 들었다.
“무슨―”
여자의 뒤에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발끈하며 한 걸음 앞으로 튀어나왔으나 이내 여자의 손에 제지당했다. 냅둬. 저거 지 죽은 애미 보고 와서 그래.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한솔은 그가 뒤이어 건넨 지포라이터를 받아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빨아들이면서 한솔은 제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납골당에서 교체해온 사탕 봉지였다.
“산 어미 앞에서 죽은 어미한테 제사 지내는 게 좀 꺼림칙해도 어쩌겠어. 저 새끼 나름의 방법인데.”
훅, 하고 담배 연기를 뱉어냄과 동시에 담배를 입에서 빼낸 한솔이 봉투 안에 담겨 있던 레몬 사탕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샛노오란 사탕 위에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을 올려두었다. 향료 섞인 설탕 덩어리가 타는 냄새가 방 안에 퍼져 나갔다. 기일과 조직 방문일 중 하나가 공교롭게도 겹쳐 1년에 한 번,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다. 방금 전 조직원은 이를 모르고 한솔에게 달려들려고 한 것을 보니 새로 보충된 인력인 듯했다. 입 안에 남은 훈향을 가시기 위해 입을 한 번 다신 한솔이 짧게 합장했다.
“죽은 어미 불 붙여 줬으면 산 어미한테도 불 한번 붙여 봐라.”
여자가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한솔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한솔은 지체 없이 라이터를 켜 작게 피어오른 불꽃을 그의 담배 끝으로 가져갔다. 턱을 살짝 쳐들고 한솔이 가져온 불을 받은 여자가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짙은 연기를 뱉어냈다. 한솔은 옷매무시를 한 번 정돈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얀 손가락이 붉은 입술 새에 걸린 종이 개비를 빼냈다.
“그래서, 별 일은 없고?”
“예, 덕분에. 아재가 안부 전해드리랍니다.”
“오펑훼이, 그 새끼 비둘기한테 돈 날려 먹는다며.”
“아… 네.”
“네가 좀 말려주고 그래라. 새끼가 이제 늙어가지고 판단력이 흐려졌나 보네.”
그의 말에 한솔은 대답 없이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사탕에서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 밍 시우. 이 자리에 오른 지 올해로 꼭 10년째를 채우고 있는 인물이었다. 원래 이 조직은 그의 아버지가 잡고 있던 곳이었다. 그때의 그는 고위 간부급 중에 한 명이었다. 실적도 가장 좋았으며 두뇌 회전이 빨라 전략과 마무리도 깔끔하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이곳을 주무르게 될 사람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확신이 과신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후계자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오빠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뒤 많은 이들이 둘 사이에 전쟁이 날 것이라든가, 그가 직계 수하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든가, 그가 아예 따로 조직을 꾸릴 것이라든가, 온갖 추측을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그의 아버지와 오빠를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11월 중순, 늦은 가을비가 내리던 새벽, 비상소집이 열렸다고 했다. 사유는 몰랐으나 조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까만 정장의 군상이 넓은 강당 안에 빽빽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앞 강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정장에 시뻘건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차밍시우였다.
“굿모닝.”
태연자약하게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고 조직원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몇 초 뒤 떡하니 강연대 위에 올라온 그들 보스의 머리를 마주해야 했다.
“하나는 부족하지, 안 그래?”
그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뒤에 서 있던 조직원 하나에게 손짓했고, 이어 그의 손길에 끌려 나온 것은 교수형 형틀에 머리가 매달린 웬 짐승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꼭 돼지 한 마디를 닮은 그 형체가 짐승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사지가 모두 잘린 몸뚱이에 머리만 붙어 버둥거리는 그의 오빠였다.
“결과물만 보여주면 서운할까 봐.”
다른 조직원이 그가 펼친 손바닥 위에 작은 주머니칼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는 오빠의 모가지를 모든 조직원 앞에서 썰어 냈다.
툭, 목 부분이 너덜 해진 몸뚱이는 강단 아래로 추락해 미끄러져 맨 앞에 서 있던 조직원 중 하나의 발치에 도달했다. 몸뚱이가 미끄러진 자리에는 붉은 흔적이 길게 남았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씨발, 냄새. 그것이 그의 감상평 전부였다.
이어 그는 웬 종이 하나를 건네받더니 나열된 이름들을 주욱 불러 강당 가운데에 일렬로 줄을 세웠다. 불려서 줄을 선 사람도, 서지 않은 사람도, 그것이 어떤 줄인 지,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에게서 칼을 받아간 조직원이 소총을 건넸다.
탕, 탕, 탕, 팅― M1 개런드의 클립 튀는 소리가 정확히 세 번 울렸다. 한 발의 실수를 제외한 총 23발의 총탄이 모두 일렬의 조직원들 대가리 정중앙에 박혔다. 모두 그의 아버지, 혹은 오라비의 아래에 가장 충실히 머리를 숙여왔던 사람들이었다. 한바탕 숙청이 완료된 뒤 그는 뜨거운 총을 조직원에게 건네주며 해사하게 웃었다.
“청소 끝. 해산.”
그렇게 차밍시우는 흑사파를 백산파로 갈아치웠다.
“우리 솔이 요새 만나는 사람은 없냐.”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묻는 밍 시우의 말에 한솔은 잠시 고민했다. 이 말의 의미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오 씨를 말리라고 했던 말도 마찬가지였다. 홍콩에서 가장 큰 조직의 윗대가리가 고작 도박판에서 노는 조직원을 말리라 할 리가 없었다. 그 말은 그저 조용한 압박에 불과했다. 나는 너희의 사소한 생활 한 조각까지도 알고 있다는. 그 뜻을 알고 있었기에 잠시 숙고하던 한솔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열었다.
“… 없습니다.”
“아하. 그럼 요새 들락거리는 꼬맹이는 그냥 뭐, 좆집 정도?”
예상한 대로였다.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고객입니다.”
“그래?”
용돈벌이다, 이거네. 밍 시우가 빨아들인 담배가 조용히 타들어갔다. 재를 털어내지 않은 담배 끝에서는 하얀 재가 길게 구부러졌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조직원이 공손히 두 손을 내밀자 밍 시우는 자연스레 그 손바닥 위에 재를 털었다.
“그래서. 이제 나올 생각은 좀 생겼고.”
“아. 아뇨. 아직… 죄송합니다.”
“흐음.”
남창을 안고 있던 밍 시우의 손이 느릿하게 뱀처럼 빠져나왔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괴며 상체를 살짝 한솔에게로 내밀었다. 한솔은 허리를 좀 더 꼿꼿이 폈다.
“슬슬 홍콩에 자리 잡아야지. 안 그러냐, 아들.”
“… 예. 노력 중입니다.”
“네 그, 저 세상 간 어미도 올려 드려야지. 위층에.”
밍 시우가 말할 때마다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입술 새에서 피어올랐다. 한솔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허공에 흩어지는 백연 뒤로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은 백산파(白狻派)의 이름답게 사자의 안광을 담고 있었다. 그의 상체가 아주 느릿하게 다시 소파로 기울었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빼냈다. 조직원이 다시 두 손을 내밀었다.
“솔아.”
“예.”
“아들.”
“… 예.”
“내가 너한테 부르는 호칭의 무게를 기억해라.”
“명심… 하겠습니다.”
밍 시우는 어느새 필터 가까이로 타들어간 담배를 조직원의 내밀어진 손바닥에 지져 껐다. 조직원은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들어가 봐. 엄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유념하겠습니다.”
한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 담배를 꺼내 물던 밍 시우가 조금 익살맞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참.”
“…?”
“그 꼬맹이 언제 한번 데리고 와라. 그래도 아들놈이 만나는 새낀데 애미가 얼굴은 알아야지.”
한솔은 대답 없이 꾸벅 허리를 반으로 접어 숙였다. 그리고 요 건물 옆쪽에 과자 가게가 새로 생겼던데 가 봐. 맛있더라. 그의 말을 뒤로 하고 돌아서 나오는 한솔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걸린 것은 그에게 안겨 있던 남창의 뭉툭하게 잘린 발목 아래였다.
오후 다섯 시, 한솔은 익숙하고 지저분한 입구로 들어섰다. 구룡은 이제 꽤 북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쪽 주머니에 삐뚜름하게 손을 꽂아 넣고 철제 계단을 오르는 한솔의 걸음마다 낡은 계단이 퉁퉁퉁, 음산하게 울었다. 왼손에는 밍 시우가 추천해준 과자 가게의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자꾸 누구 얼굴이 하나 어른거려서 결국 들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내 숨이 조금씩 거칠어질 때쯤, 6층의 경계에 한솔의 발이 올랐다. 사무실 문 바닥 틈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거 보면 오 씨는 작업 중인 듯 했고, 미홍은 내부에서 약간의 소음이 샜으나 불은 아직 꺼져 있었다. 영업 준비 중인가 보네. 흘긋 유리창을 바라봤던 한솔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복도로 들어섰다. 정장에 묻은 오물은 세척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뚜벅이는 발걸음 소리가 하나 둘 영업을 시작한 가게들 덕에 외출할 때보다는 밝아진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한솔은 제가 들고 있는 과자를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제 집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속옷 차림의 인영을 발견한 순간, 한솔은 머릿속 시뮬레이션들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알았다. 걸음을 멈췄다. 멈춘 발소리에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운 눈동자가 한솔에게 시리게 박혀 왔다.
“…….”
“…….”
“… 어디 갔었어.”
“바깥.”
“배신자.”
민규는 대뜸 한솔을 매도했다. 한솔은 아무 말 없이 민규를 응시했다. 민규가 자리서 일어났다. 배신자. 잔뜩 약이 오른 민규가 짓이기듯 말을 뱉었다. 배신자야, 넌. 이 배신자. 배신자. 민규는 단어 하나를 뱉을 때마다 한솔의 어깨를 주먹으로 밀쳤다. 배신자. 나쁜 새끼. 배신자. 민규의 손길마다 비칠거리면서도 한솔은 그저 가만히 민규를 받아 내었다.
“… 가버린 줄 알았어.”
아직 저녁도 찾아오지 않았으나 벌써 컴컴한 방 안에서 둘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솔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답했다. 왜. 제게서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민규가 새우처럼 몸을 느리게 말았다.
“… 마담이 맨날 그랬단 말야.”
“뭐라고.”
“너는 곧 갈 거라고.”
“어딜.”
“바깥.”
“내가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도르륵. 민규의 입속에서 한솔이 사 온 사탕이 구르면서 민규의 이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솔은 조용히 숨을 내쉬면서 눈만 깜박였다.
“… 진짜야?”
“뭐가.”
“마담이 하는 말.”
“그게 뭔데.”
“가냐고.”
“어딜.”
“야, 최한―”
“안 가.”
“… 진짜?”
“그래. 갈 데가 어디 있어.”
도륵. 민규의 입속에서 사탕이 한 번 더 굴렀다. 잠시 조용하던 민규가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혹시 나가면,”
“어.”
“나랑 같이 가.”
“…….”
“내 꿈이야. 나가는 거.”
“… 꿈?”
“어. 돈을 존나 벌어서, 꼭, 홍콩에 갈 거야.”
“여기도 홍콩인데.”
“여긴 구룡이지, 등신아.”
민규가 발끈했다. 한솔은 입을 닫았다. 민규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홍콩에 있으나 홍콩에 없는 곳. 구룡.
“… 가서 뭐하게.”
“홍콩?”
“그래.”
민규는 사탕을 다시 왼쪽 볼로 옮겨 물었다.
“죽을 거야.”
“…….”
“홍콩에서, 죽을 거야.”
한솔은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야. 민규가 한솔을 재차 불러왔다.
“나 안아줘.”
천천히 옆으로 돌아누운 한솔이 느리게 민규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렇게 둘은 민규가 일을 가기 전까지 한참을 같은 자세로 함께 붙어 있었다. 서로가 뱉는 날숨이 뜨거워 더 아픈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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