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화양연화(花樣年華) 04.
2020. 2. 16. 19:4104.
찰칵, 끽, 툭. 상자를 지정된 위치에 내려 두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조금 서글픈 기분마저 들게 하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솔이 왔냐.”
“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삐뚜름하게 쳐들었던 한솔이 나온 얼굴을 보고 외마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어설픈 인사를 했다. 오 씨는 낡은 라텍스 장갑 낀 왼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한솔을 불렀다.
“마침 잘 왔어. 이거 좀 도와.”
“뭔데?”
“잔말말구.”
여즉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그려 상자가 든 봉지 손잡이를 쥐고 있던 한솔이 몸을 세웠다. 오 씨가 열어놓은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희끄무레한 백열등 불빛이 차 있는 방 안은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느린 팔자걸음으로 허영허영한 걸음걸이의 오 씨를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포르말린 냄새와 특유의 악취가 점차 강하게 코를 찔러왔다. 그리고 그 냄새의 끝에는 웬 늙은 여자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외상 안 갚고 뒤졌어?”
“아니. 아들놈이.”
“아들놈이 뒤졌다고?”
“아니. 그놈이 외상을 못 갚아서 지 애미를 넘겼다고.”
“아.”
막 이빨 뽑고 있던 참이었는데, 시팔, 내 눈이 요즘 여간 침침해야 말이지. 오 씨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내고 눈을 부볐다. 그러니까 권 씨네 가서 안경 좀 맞추라니까. 오 씨에게서 장갑과 펜치를 넘겨받은 한솔이 뻑뻑한 장갑에 오른손을 밀어 넣으며 지나가듯 면박을 줬다. 에비, 그 얼뜨기한테 내 눈깔을 맡길 바에야 뽑고 말지. 오 씨는 오른손에 끼고 있던 의수를 벗어내고 땀이 찼던 접합부를 손부채질로 말렸다. 손에 쥔 펜치를 두 번 꾹꾹 쥐자 낡은 스프링에서 끽끽 튀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그래도. 좀 모자라서 그렇지 나쁘진 않잖아.”
“너는, 씨발놈아, 성격으로 사람 눈깔 디비 보냐. 힘 조절 잘하고. 이빨 부수지 마라.”
펜치를 한껏 벌어진 노인의 입 속으로 집어넣던 한솔이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알아. 한두 번 하나.
“은니는 뽑지 말어. 은은 돈 안 돼, 요새.”
“… 드럽게 어둡네. 전등이나 갈아.”
“그래서 너한테 시키잖냐―.”
오 씨는 뻔뻔하게 대꾸하고 낄낄거리며 책상에 놓인 힙 플라스크를 잡아 채 위스키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꿀꺽꿀꺽, 액체가 목젖을 치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다.
“자, 일단 하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입 속에서 나온 펜치가 오 씨 눈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오 씨는 들고 있던 힙 플라스크를 내려두고 네모난 스테인리스 쟁반을 집어 받쳤다. 펜치 끝에서 반짝거리던 금니가 통, 하고 쓸데없이 청량한 소리와 함께 쟁반에 떨어졌다. 한솔은 펜치를 다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들이라는 놈이 그깟 화학 물질을 손에서 못 놔서 지 어미 시체를 외상값 대신으로 팔아넘겼다. 바깥이라면 신문 1면에 대서특필 되고도 남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인륜에 인륜 륜(倫) 자 대신, 바퀴 륜(輪)을 쓰는 곳. 구룡의 사람은 바퀴로 구른다. 어차피 도덕 규범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사회가 변하면 윤리도 변한다. 이 사회에 적합한 윤리는 이런 것이다. 한솔은 펜치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고 보니 너, 미홍에 애새끼 하나랑 배 맞았다며?”
“뭔 소리야, 그건 또.”
쟁반 위에 놓인 금니가 벌써 세 개째였다. 네 개째를 뽑으려 펜치를 밀어 넣던 한솔이 건조한 귀찮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구룡은 쓸데없이 소문이 빨랐고, 한솔은 그런 삼류 언어의 계주에 관심이 없었다. 오 씨는 쟁반을 잠시 내려놓고 위스키를 다시 마셨다. 크으― 새끼, 내가 다리 놓을 때마다 관심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이.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고추가 없어서 관심이 없었고만.”
“맨날 뒤질 때 다 됐다더니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아직 갈 때는 아니네, 아재.”
네 번째 금니를 쟁반에 내려놓은 한솔이 잠시 허리를 펴고 목을 돌려 뻐근한 근육을 풀었다. 누가 그래? 무관심한 척 은근하게 소문의 근원을 물어오는 한솔에 오 씨는 한 번 더 위스키를 꼴깍였다. 누구긴. 팽 마담이지.
“… 하여간 그 할매, 진짜…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뭐라고?”
“뭐. 아재랑 같은 날에 관에나 들어가면 좋겠다 그랬다. 왜.”
“이 후레자식, 말뽄새 하고는….”
꼭 나를 닮았어. 오 씨는 킬킬거리며 뭉툭한 오른 손목으로 한솔의 등허리를 퍽 쳤다. 아. 아파. 엄살 부리지 마, 씨벌놈아.
“그래서. 좋냐?”
“뭐가.”
“걔 유명하잖냐. 진짜 그만치 좋냐, 이거지.”
오 씨는 다섯 번째 금니를 뽑는 한솔의 옆에서 왼손을 주먹 쥐고 공중에 무언가를 쑤시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시야 한 구석에 들어온 그 손짓이 무슨 의미인지 한솔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미간이 화악 좁혀 들었다.
“아재. 술 그만 마셔라. 취했다.”
“뭠마? 쌔애끼. 꼴에 지 깔이라고….”
통, 또르륵. 금니가 스테인리스 쟁반 위를 굴렀다. 오 씨가 그 소리를 안주삼아 기계적으로 위스키를 마시려던 순간, 그의 눈앞으로 투박한 펜치 끝이 불쑥 내밀어졌다. 멍하니 흐려지던 초점 안에 갑작스레 쇳덩이가 들어오자 놀랐는지 오 씨가 흠칫했다. 받아. 펜치가 흔들렸다. 끝났어. 한솔은 장갑을 벗었다.
야. 민규가 한솔을 불렀다. 한솔은 또다시 대답이 없었다. 한솔의 허벅지를 베고 있던 민규가 머리에 힘을 줘 허벅지를 꾸욱 누르자 그제야 한솔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왜.
“그거 재밌어?”
한솔이 들고 있는 책의 바닥이 민규의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책장은 군데군데 검은 손때가 티 나게 묻어 있었다. 한솔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근데 왜 봐?”
“그냥. 글자라서.”
뭐야. 실망했는지 민규는 싱거운 중얼거림을 뱉으며 머리에 힘을 뺐다. 이해 안 돼. 민규가 고개를 흔들자 앞머리가 움직임을 따라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야. 의미 없이 손장난을 치던 민규가 한솔을 재차 불렀다. 왜.
“넌 왜 나랑 안 자?”
팔랑, 넘어가려던 책장이 멈췄다. 뭐?
“왜 나랑 안 자냐고.”
아니 이 인간들이 진짜… 오늘 단체로 왜 이래? 한솔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제 다리 위의 문제아를 바라보았다. 민규는 곤란함보다는 혼란스러움이 어린 한솔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저런 눈 처음 보네. 민규는 눈만 한 번 깜박, 닫았다 열었다. 이 형은 도대체가. 천진하기 그지없는 표정에 한숨을 내쉰 한솔이 조금 예민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이 팽 마담한테 그랬냐?”
“마담? 마담이 왜?”
“… 됐다. 그리고 나는 형이랑 안 자.”
“왜?”
“자야 돼?”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이 정도까지 나한테 손 안 대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나 인기 많아. 책을 다시 집어 들려던 한솔의 손이 책 모서리에도 닿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민규의 눈동자에 담긴 한솔의 눈은, 시작점을 찾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어수선한 눈동자 속에 피로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민규는 만족했다. 한솔은 콧등을 문지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형은 진짜….”
“왜. 뭐. 왜.”
“… 됐고. 안 가? 늦었어.”
“싫어. 오늘은 여기서 잘래.”
“안 돼.”
“왜?”
“형 너무 커서 침대 좁아. 몸부림 한 번만 해도 내 자리 없어진다고.”
“몸부림 안 할게.”
“말이 돼? 그럼 덩치는 뭐, 잘라오게?”
나가. 한솔의 손이 민규의 뒤통수를 밀어냈다. 민규는 밀려나지 않으려 뒷목부터 머리까지 힘을 주고 버텨보았으나 갑작스레 겨드랑이 틈새를 파고들어온 다른 손에 균형을 잃고 결국 한솔의 허벅지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악. 요상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 바퀴 빙글 굴렀던 민규는 잠시간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발딱 상체를 세웠다.
“씨발, 존나 못 됐어. 나이도 어린 게.”
“어쩌라고. 가, 이제.”
“나 내일부터 다시 일 해.”
“잘 됐네.”
“그래서 여기 잘 못 와.”
“그러니까 잘 됐네.”
민규는 약이 바짝 오른 표정으로 한솔을 칩떠보았다. 그러나 한솔은 아랑곳 않고 오른손을 휘휘 내저어 민규를 쫓았다. 민규는 씩씩대며 문으로 향했다.
“나 보고 싶다고 질질 짜지나 마라.”
“너무 좋아하는 티는 안 내도록 노력해볼게.”
“… 개새끼.”
꽝.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이고. 제대로 기분이 상하셨네. 쿵쿵거리는 무거운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가운데, 한솔은 눈썹을 한번 으쓱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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