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Egg-and-Spoon race :: 1.0
2019. 6. 20. 12:32*Killing Me To Love You_Vancouver Sleep Clinic
*타씨피(윤겸) 언급이 있습니다.
적당함이라는 타협점을 알게 되는 것은 매우 불운한 일이다. 열정, 꼬마의 웃음, 노력, 정열, 플로리다의 애정, 짝사랑의 증오, 미움, 앵무새의 애착, 솜사탕의 악랄함, 관심, 갈망의 역겨움, 사랑의 눈웃음, 분노, 새벽의 비애, 시인의 즐거움, 오열, 오후 두 시의 눈물, 땀, 연인의 더위, 희망, 공휴일, 커피의 소용돌이, 배신감, 비속어의 무게, 50대의 절망, 욕정, 취기의 각오, 고양이의 낮잠, 나의 부질 없는 감정. 열을 품은 모든 것들은 적당의 앞에서 온도를 잃고 녹아내린다. 뚜렷한 기호를 잃어버린 존재자들이 한데 녹아내려 뒤엉키면 그것들은 이내 무색, 무취의 비석으로 단단히 응고된다. 이는 모든 상실에 바치는 애도다.
나에게 최한솔과의 연애는 딱, 적당하다.
Egg-and-Spoon race :: 1.0
_but it’s killing me to love you
눈을 떴을 때 최한솔은 없었다. 어차피 너의 부재 속에서 잠을 청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진 않았으나 그래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슴 한 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별다른 미련 없이 일어났지만.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아무렇게나 한 번 쓸어넘기고 침대를 내려오자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발바닥에 매끌하게 다가오는 나무의 감촉은 한여름에 느끼는 것이라도 조금 차가워서 가볍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지만 저 멀리 창틀 아래로 떠내려간 슬리퍼에 굳이 발을 끼워넣지는 않았다. 귀찮고, 번거롭고, 그리고 최한솔을 빨리 침대에 눕혀야 했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은 달칵, 하고 시계태엽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오니 역시나 최한솔은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대강 웅크린, 나를 쓸쓸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최한솔이 여행에서 돌아와 밤새 기초 작업을 끝마친 뒤 새벽에 침실로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귀찮음이 아니었다. 오로지 자고 있는 내가 깰까봐. 그래서 조심하는 거였다. 나는 그 정도로 잠귀가 밝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최한솔은 혹시라는 가능성을 예방하는 것에 더 치중했다.
“…….”
나무 블라인드 틈새로 끼어들어와 살짝 눌린 연한 갈빛의 뒷머리칼과 미세하게 움츠러든 등판 위에 어려 있는 빗살무늬의 햇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살금 다가가 최한솔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한솔아. 최한솔. 일어나봐. 올라가서 더 자.”
내 손길에 나지막하게 으음, 하고 약하게 잠투정을 하던 최한솔은 한쪽 눈으로만 실눈을 뜨고 손길의 주인을 확인한다. 아… 형. 하는 부름은 의식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단 잠꼬대다. 어깨에 얹힌 내 손 위로 나무늘보같이 겹쳐오는 손을 바라봤다가 나는 아예 최한솔의 머리 옆쪽에 대충 걸터앉아 최한솔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느릿하게 일으켜 세웠다. 내 손등에 힘없이 걸쳐있던 납닥한 손은 금방 툭, 떨어진다.
“여기서 이러면 근육통 생겨. 빨리 올라가서 침대에 누워서 자.”
“으응….”
대답인지 그냥 옹알이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은 최한솔은 잠시 내가 일으켜 준 그대로 앉아 있다가 겨우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러다 넘어지는 거 아냐? 비틀, 하는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숨 죽인채 보고 있는데 다행히 어디 박지는 않고 계단도 잘 찾아 올라간다. 그렇게 최한솔은 뒤늦게 침실로 사라졌다.
최한솔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은 어수선하다. 어제 채 다 풀지 못한 여행 짐부터, 급하게 꺼내 소파 앞 좌탁 위에 펼쳐놓은 사진들, 식탁 위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메모들과 참고 문헌들, 새벽에 최한솔이 간단하게 먹었던 야식의 흔적, 거기에 쓸데없는 감상에 젖기 직전인 나까지. 어느 것 하나 지저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단, 커피를 마시자. 커피를 마시고, 오후 계획을 짜자. 쓸모없는 지랄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게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데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최한솔의 폰에서 울리는 진동이 내 걸음을 잡아끈다. 대리석과 마찰하는 작은 쇳덩어리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꽤나 커서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폰을 낚아채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정한이 형’ 이라 적힌 글씨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 어, 솔… 이 아니네.
“응.”
- 하긴, 걔 지금 자겠구나. 너도 한솔이 와서 일 뺐고.
“그치. 뭐, 급한 일이야? 깨워줘?”
- 아, 아냐. 오히려 잘 됐어. 마침 너한테도 할 말 있었으니까.
“아하.”
나는 최한솔이 어제 식탁에 남기고 간 것들을 성의 없는 손길로 훑어내다가 왼쪽 귀에 대고 있던 전화를 오른쪽으로 바꿔 받으며 커피 머신쪽으로 발을 옮겼다.
- 일단 한솔이한테 이번 바르셀로나 편에 들어갈 세 번째 사진이 누락됐다고, 눈 뜨자마자 그거부터 보내라고 전해줄래?
“오키. 바르셀로나, 세 번째 사진. 또?”
- 한솔이한테 전할 건 그게 다였고, 그 뭐냐, 이번에 석민이 가게 오픈 있잖아.
“아, 어어.”
무의식적으로 커피 머신의 전원을 켜다가 가동 준비를 하는 기계의 소음이 너무 커 재빠르게 코드를 뽑아 버렸다. 미쳤나, 이게. 아니 이거 원래 소리가 이렇게 컸나? 괜히 신경쓰여 고개를 살짝 빼 계단 쪽을 바라봤다가 머신 옆에 놓인 수동 그라인더를 집어들었다. 전화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고정하곤 백에서 한 움큼 꺼낸 원두를 핸드밀 안에 흘려보냈다. 뚜껑을 닫고 손잡이를 돌리자 투두둑, 투둑, 하고 커피콩 분쇄되는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흩어진다.
- 거기에 석민이가 뭐 하나 더 놓고 싶은 가구가 있나봐. 뭐라더라, 이름이. 나한테 전해달라고 도안을 보내줬었는데… 지금… 내가 그걸 못 찾겠네. 여튼, 찾는대로 너한테 이메일 보낼테니까 보고 제작 가능한지 좀 말해줘.
“할 수 있겠지, 뭐. 어차피 모던 기반에 자연주의 컨셉으로 간다며. 그럼 또 우드 슬랩 활용하고 싶어하는 거 아냐?”
-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모르고. 아무튼 그냥 전체적으로 통일하는 거 같긴 해. 가게 오픈에 필수적인 건 아니라서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 일단 견적 내달라더라.
“알았어. 그럼 일단 찾으면 보내줘.”
주절주절 떠들면서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모카포트용으로 곱게 갈린 원두가 유리받이 안에 소복이 쌓였다. 커피를 끓이려 받이를 돌려 빼내는데 알겠으,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슬슬 전화가 마무리되려는 흐름에 바스켓에 커피가루를 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형, 형!”
- 깜짝이야. 야. 나 아직 안 뗐어, 전화. 뭘 그렇게 급하게 불러.
“아, 미안.”
- 근데 왜.
“아… 그냥. 형 지금 뭐해?”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얄팍한 기대가 젖어든다.
- 나? 원고들 검토하지.
“아….”
- 왜.
“아냐, 그냥. 심심해서.”
- … 너 괜찮아?
아. 괜히 말했다. 조금 벅차서 누구라도 붙잡고 싶었던 거지, 울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뻐근해지는 눈물샘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급한 손길로 바스켓에 가루를 마저 부으며 대충 뇌까렸다.
“아, 뭐래, 또. 내가 멋대로 추측하는 버릇 좀 고치라는데 윤정한 또 버릇 나오죠.”
- 웃기시네. 야, 속일 사람을 속여. 형 정한이 형이다, 민규야.
“아 뭐 어쩌라고. 나 커피 마실 거야. 끊어.”
- 이따 네 시 쯤엔 한가해지니까 그 때 잠시 보든가.
윤정한의 빠른 눈치는 이따금 내게 너무 버겁다. 자꾸만 묵직해지려 하는 목울대에 애꿎은 마른침만 꼴깍거려 말이 나올 틈새를 겨우 벌려냈다.
“됐어. 나 한솔이랑 영화 봐야 돼.”
- 그래? 그럼 뭐.
“응.”
- 무튼 괜히 혼자 삭이지 말고. 병 나기 전에 말 해. 알았지.
“… 끊어.”
최한솔도 모르는 혼자만의 기약 없는 약속을 만들어 윤정한에게 들이밀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거짓말을 형이 몰랐을 리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최한솔 얘기였던 덕에 핑계가 먹혔는지 전화는 끊겼고, 나는 금세 우두커니가 되었다. 눈물샘이 혼자 미쳐돌아간다. 결국 흐려진 시야 탓에 엎지르고 만 커피 가루 위로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이 굴러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들고 온 커피잔 테두리를 만지작였다. 요즘 나는 혼자 침울해졌다가 또 금세 멀쩡해지고, 다시 한순간에 무력한 우울감으로 추락했다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간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도무지 튕겨나올 수 없는 음울이 나를 휘감는 시간이 있었다.
흔히들 감정에 압도되어 버린다는 새벽은 나에게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 머리가 축축해질 것 같으면 눈을 감고 자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내게 정말로 무서운 시간은 최한솔이 있지만 없는, 또 없지만 있는, 이런 한낮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우울을 밝은 햇살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 버리는 이 시간이 나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런 순간은 도망칠 구석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서, 나는 초점 없는 시선을 창문에 내려진 블라인드 틈새로 물끄러미 던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네 여행 마지막 날의 통화에서 너는 내 말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네가 흘러가듯 내뱉은 된장찌개 먹고 싶다던 말도 기억하고 있는 것. 그런 불균형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기보단 이해하게 되었다. 성향 차이일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어제 말했듯이 그런 격차쯤은 내가 최한솔이 잊어먹을 수 없게 기록을 남겨주면 되는 거니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종종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 그래서 약속에 늦는다든가, 혼자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여행에서 돌아온 날에는 무조건 기초 자료를 정리해야 해서 나를 혼자 잠들게 만들고, 나를 깨울 수 없다는 사명으로 다음 날 아침도 혼자 맞이하게 만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김민규에겐 최한솔이 부러 잠을 깨워줬으면 하는 새벽이 이따금 존재함을 네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7년이면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 아무렇지 않게 넘길 때도 됐지. 하지만 여전히 오늘 아침처럼, 내게서 돌아선 너의 등을 볼 때면, 그럴 때면, 나는, 최한솔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자리가 내 옆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이면’ 은 어느새 ‘이나’ 로 바뀌어 나를 괴롭혔다. 7년이나 됐는데도 이렇다면. 한 두해도 아니고 일곱 해나 보냈는데도. 그래도 여전하다면. 우리는. 갑자기 아까 전화를 걸어 온 윤정한이 미워졌다. 지금 또 이렇게 스콜같은 우울에 젖어들기 시작한 원인이 꼭 그 전화인 것 같다. 아닌 걸 알지만 그럼에도 네 탓은 하기가 싫어서, 나는 정한이 형에게 투정하고, 나를 책망하고, 너를… 그리워하고.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네가 보고 싶은 나는 정말 끔찍하다. 하지만 이 이상 파고 들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기에 나는 주문처럼 혼잣말을 했다. 됐어. 이 정도의 연애면 적당해. 특별히 싸우지도 않고, 서로 배려하고. 아주 적절한 연애라고 생각하며 애써 나를 추스린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덥고, 정신 없고, 피곤한 와중에 한 전화였는데 내가 그런 말을 했던 사실이라도 기억했던 게 어디야. 그 정도면 적당하지. 이는 2년 반 전에 내가 몸소 깨달은 합의점이었다.
수도꼭지는 겨우 잠갔지만 그렇지 않아도 연하게 탄 커피는 눈물로 웅덩이가 져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커피를 싱크대에 대충 쏟아붓고 세수를 하고 다시 돌아와 좌탁 위의 사진 한 장을 집어들었다. 네가 다녀온 나미비아 사막이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다. 이 모래 바다가 너는 얼마나 좋았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22시간, 거기서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까지 1시간 반 남짓, 그리고 빈트후크에서 이 사막까지는 또 버스를 타고 6시간을 걸려서 가야 한다고 했다.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들여 간 사막에 도착했을 때, 너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아주 조금은 외로웠을까? 그랬어, 한솔아? 그랬으면 좋겠다. 왜냐면 매일 누워 있는 침대도 나한테는 사막이니까.
최한솔은 그로부터 세 시간이 더 지난 뒤에 일어나 내게로 왔다. 우리 점심 뭐 먹어?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과 함께 다가온 짧은 입맞춤은 소독용 알코올 솜이 스치고 간 것처럼 찰나에 휘발된다. 내 허리에 슬쩍 깃털처럼 와닿았던 손길은 곧바로 아일랜드 바 위에 놓인 쿠키 접시로 향했다. 과자를 우물거리는 네 입매가 위태롭게 파도에 휩쓸리는 돛단배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직 열감이 다 가시지 않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글쎄.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시킬까? 아니면, 뭐 해줄까? 참. 정한이 형이 너 바르셀로나 원고에 세 번째 사진 누락됐다고 보내달래.
“아 진짜요? 그게 왜 누락됐지. 알겠어요. 이따 보낼게. 점심은 나도 다 괜찮은데, 형이 저번에 해줬던 스튜도 괜찮은 거 같고? 어, 형, 근데―”
네 말꼬리가 느릿하게 늘어지고, 연갈색의 맑은 눈동자가 내게 향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식탁에 펼쳐놓은 지도를 접던 네가 손을 멈추고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눈가를 누르던 손이 멈춘다. 설마. 옅은 긴장을 품은 심장 박동이 약하게 빨라진다.
“여기… 커피 가루 묻었어.”
아직 세안의 물기가 남아 있는 네 엄지가 내 턱을 스치고 내려갔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씁쓸한 안도감에 작게 웃음이 샌다. 나도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금세 돌아서 커피 머신쪽으로 다가가는 너를 쫓아가 뽑아버렸던 코드를 다시 꼽아준다. … 한솔아.
“왜.”
“우리 이따 영화볼까?”
“이따? 언제.”
“아무 때나.”
“그래요. 나는 너무 좋지.”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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