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Egg-and-Spoon race :: 1.1
2019. 6. 29. 00:10*Crush Culture_Conan Gray
*타씨피(윤겸) 언급이 있습니다.
최한솔은 이른 기상과 사이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을 해야 하는 나와는 다르게, 에세이를 집필하는 최한솔은 그저 본인이 편한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최한솔의 아침은 상당히 이르게 시동을 걸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Morning, my gyu―”
“아 및…! 친. 야. 내가 커피 들고 있을 때 이렇게 소리 없이 와서 엉덩이 만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으음… 했나―? 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중요해?”
“일단 손이나 떼고 말해라.”
“그 커피 나 주면 뗄게.”
“까불지, 또.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엉덩이 때문에 놀라서 제일 이상한 걸 눈치 못 챘네.”
나는 내 엉덩이에 가 있는 최한솔 손을 떼어내 커피잔을 들려주고는 다시금 커피 머신 버튼을 눌렀다. 뜨거운 커피를 후― 불어내고 홀짝이는 최한솔의 소음이 귀를 간지럽힌다.
“몰라. 그냥 눈이 떠지던데? 아직 시차 때문에 그런가?”
“그렇다기엔 벌써 4일쯤 지나지 않았니?”
“뭐… 상관없죠. 어차피 작업 시작하면 또 돌아갈 텐데.”
그건 그래. 대수롭지 않게 답 하는 최한솔에 나도 고개를 무심하게 끄덕이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최한솔이 물어왔다. 오늘 형 살랑 가죠?
“어, 맞아.”
“나 데려가면 안 돼?”
“너? 하긴, 너 거기 가는 거 좋아하지.”
어. 완전 어. 최한솔은 눈을 반짝 빛내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나 데려가 줘. 같이 가자. 기다란 팔이 나팔꽃 덩굴처럼 내 허리에 감겨온다.
“근데 지금은 나 사무실 가는데? 거긴 세 시에 가.”
“괜찮아. 그럼 사무실도 같이 가자. 난 글 쓸게.”
나는 최한솔을 이긴 적이 없다. 최한솔도 그건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이러지. 영악한 바다거북 같으니. 어차피 승낙해줄 건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답이 없으니 한 술 더 떠 덧붙인다. 그래서 살랑 갔다가 들어오면서 저녁도 먹고 들어오자. 그러면 안 돼요?
안 되는 게 있겠니, 내가 너한테.
“…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해. 나 십 분 안에 나갈 거야.”
“나이스―.”
빨리 준비하라는 말은 형식에 불과했다. 생색 좀 내보는 거지. 네 입술은 밤바다를 유유히 유랑하는 유람선처럼 느릿하게 내 입술로 포개져왔고, 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일간 신문같이 찾아온 이른 아침의 키스는 커피 향이 쓰다.
Egg-and-Spoon race :: 1.1
_all this love is suffocating
최한솔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살랑’ 은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느새 여백 없이 담벼락을 메운 담쟁이덩굴 덕에 완전히 숨겨져 버린 입구는 그 앞에 놓인 가짜 전화기에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부터 최한솔의 취향에 아주 딱 들어맞았다. 네 번쯤 헛다리를 짚던 최한솔은 겨우 정답을 알아내고 문을 열었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5미터 정도로 짤막하게 펼쳐지는 오솔길은 주변에 한껏 무성하게 녹음이 우거져 제법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단순한 퍼퓸샵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았으면 좋겠어. 이석민의 바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길이었다.
일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한솔 한 명은 어마하게 감동시킨 것 같으니 그 정도면 일차는 성공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곧이어 오솔길 끝자락에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정원은 최한솔을 완전히 관광객 모드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피날레는 정원의 가운데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는 건물이었다.
“와― 이제는 진짜 거의 다 완성이구나.”
“왔어?”
“와, 형. 이건 완전 각이 섰는데요? 대박 날 각.”
입과 눈을 한껏 벌린 채 연신 감탄사만 내뱉던 최한솔과 그 뒤를 비교적 조용히 따라가던 나는 마침 잡동사니가 든 박스를 들고 안쪽에서 나오는 이석민과 마주쳤다.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부지 전체를 넓게 가리키며 하는 최한솔의 칭찬에 이석민은 약간의 쑥스러움과 설렘이 묻어나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보이니까 다행이다.”
“예, 완―전! 분위기가 진짜, 형이랑도 너무 잘 어울리고.”
“민규 덕이지. 민규가 워낙 가구하고 내부 디자인을 잘해줘서.”
반 박자 느린 최한솔의 호들갑을 배경음 삼아 새로 놓을 가구 자리를 눈대중으로 훑어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레 내게로 돌아온 칭찬 타임에 조금 당황스레 내 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 발린 겸손이라도 떨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내 입술보다는 최한솔의 손이 빨랐다.
“그쵸. 민규 형이 기본적인 실력도 좋은데 안목도 좋아서 그런가, 단순히 그냥 예쁜 가구나 인테리어가 아니라 좀, 뭐라 해야 하지? 주문을 의뢰한 사람하고 잘 얽히게 만들더라고요.”
뼈마디가 굵고 도드라진 편인 손이 거미줄처럼 내 손에 얽혀 왔다. 그래서 건물 전체가 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런 게 있어요.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최한솔은 사람을 담백하게 추켜세우는 재주가 있었다. 듣는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차분히 진솔함을 전하는, 내가 사랑했던 한솔. 늘 한결같은, 나의 최한솔.
조곤조곤한 영화 감상평 같은 최한솔의 칭찬이 늘어지자 오묘하게 흐뭇한 이석민의 눈빛이 내 오른쪽 볼에 와 닿는다. 나는 다소 부담스러운 그 시선을 대충 퉁겨내곤 분주하게 건물 내부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인부들을 훑어봤다가 슬쩍 깍지를 풀어내 바지 주머니에 삐뚜름히 손을 꽂았다.
“그래서, 너가 얘기한 장식장은 정확히 어디 놓고 싶다는 거야?”
“아, 그건―”
“석민아― 이건 그냥 버릴까?”
“오, 형! 안녕하세요.”
“뭐야, 형이 왜 여기 있어?”
정체 모를 선들을 주렁주렁 손에 휘감아 들고 나온 윤정한이 최한솔의 인사를 받아주다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올려 봤다.
“야, 무슨… 지금 그 말을 네가 나한테 하는 게 맞겠냐, 아니면 내가 얘한테 하는 게 맞겠냐?”
윤정한이 말하는 ‘얘’는 최한솔이었다. 하긴, 그야 그렇지.
“얘 워낙 여기 오는 거 좋아하잖아. 무슨 해리포터 속 세계 같다면서. 그래도 얘는 근무 시간이 거의 프리랜서라기도 하지, 형은 지금 회사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반차 냈지.”
형은 반차를 남들이 점심 메뉴 말하듯 이야기했다. 석민아, 이거 버려도 되는 거 맞아? 지저분한 먼지로 얼룩진 손끝에 살짝 부러진 윤정한의 오른쪽 엄지손톱이 뒤늦게 눈에 걸린다. 서로를 위해 각자의 시간을 희생하는 일이 식사 같은 자연스러움과 익숙함을 띠는 사이. 둘이 하고 있는 같은 모양의 목걸이가 오늘따라 시선을 잡아끌어 애꿎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 김민규 존나 유치하네. 하다하다 친구네 연애를 질투하고 있니. 못났다, 정말. 속으로 스스로에게 짤막하게 면박을 주는데 영 뒷맛이 개운하지 못해 입꼬리 쪽을 잘근 앞니로 물었다. 직업정신 투철한 척 아직 조명이 완성되지 않아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자니 이석민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 넘어온다. 그러고 보니 한솔이 너는 이번에 무슨 나비? 나미? 암튼 무슨 사막 갔다 왔다면서.
“아아. 네, 나미비아 사막 다녀왔죠.”
“아, 그래, 나미비아. 맞아. 어디에 있는 사막이야? 중동 쪽인가?”
“아뇨, 그건 아니고, 아프리카예요.”
아프리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튄다. 하지만 쳐든 고개를 내리진 않았다. 별로 참여하고 싶은 대화가 아니었다.
“와―, 아프리카. 그거 막 TV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피, 그런 다큐에서만 듣던 곳 아니냐? 엄청 덥지 않아? 이제 보니 너 좀 탄 것 같긴 하다, 야.”
“맞아요, 맞아요. 꽤 탔어요. 옷 벗으면 완전 티 나요. 덥기도 더웠죠. 그래도 여기랑 계절이 반대라서 죽을 만큼 힘들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일부러 그쪽 겨울에 맞춰서 간 거라.”
“오… 진짜 멋있다. 어, 근데 정한이 형 말로는 너 아프리카 나중에 간다던데?”
“아, 그거는― 이제, 그, 아프리카 전체 도는 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사전답사?처럼 다녀온 거예요.”
“그럼 그건 언제 가는데?”
“11월에 나가려고요. 아직 날짜는 모르겠고.”
… 잠깐만. 뭐라고? 안 듣는 척 고집스레 젖히고 있던 고개가 단숨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석민과 11월? 하고 확인차 되묻는 윤정한, 그리고 너무도 평온한 최한솔. 그 사이에서 나만 외딴섬이다.
“… 야, 너 뭐라 그랬어?”
“응?”
“언제 어딜 나가?”
“11월… 에, 아프… 리카……”
머리가 찡― 하고 아찔하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던 머리에 갑자기 피가 쏠려서인지, 그게 아니면. 굳어진 내 표정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는지 최한솔의 말이 점점 길어졌다. 탁해진 갈빛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구르고, 재수 없게 사건에 관련되어 버린 두 사람은 숨을 죽인다. 반경 2미터 정도의 주위가 순식간에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다.
“말 안 했잖아, 나한테.”
“… 말… 하지 않았어요? 저번에―”
“안 했어.”
“…….”
“말 안 했어, 한솔아.”
언급은 고사하고, 흘리지도 않았어. 아니 그러니까, 아프리카 말고. 언제 가는지는, 말 안 했잖아 나한테. 최한솔의 눈이 서글프게 나를 향한다. 속이 텅 빈 유리구슬 같은 눈은 당장이라도 쨍그랑, 깨져나갈 것 같다.
“정하고 있다고 했잖아.”
“… 진짜 미안해요. 나는… 진짜로, 말 한 줄 알았어요. 나도 이게 그쪽 사람들하고 계속 조율 중이었다가 며칠 전에 갑자기―”
“한솔아.”
“… 형, 나는―”
“최한솔.”
“정말로, 얼마 전ㅇ,”
“그만해.”
“…….”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집에 가서, 그때 말해. 석민아, 자리 알려줘. 장식장 놓을 자리.”
나는 천적을 만난 소라게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이석민은 고맙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 직소기가 합판을 써는 소리, 망치 두드리는 소리, 누가 누구를 부르는 소리, 잡다한 소란이 그제야 귀를 날카롭게 때린다. 그 가운데서도 내 뒤에 남아 윤정한에게 형, 제가, 하는 최한솔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나를 잡아당겨서 나는 딱, 죽고 싶었다.
시간을 죽이기에는 일 만한 게 없었다. 이석민과 가구 소재며 모양이며 이것저것 의견을 나누고, 간단하게 견적을 내고, 정리까지 얼추 도와주고 나니 밖은 어느새 안개같이 내려앉는 노을에 젖어들고 있었다. 지랄 맞게 이쁘네. 담쟁이덩굴 문을 열고 나오니 마구 으깬 자몽 과육에 물든 것 같은 색의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평소 같았으면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었을 텐데 나는 그 대신 조용히 담배만 꺼내 물었다. 카메라야 차 안에 있었다만 굳이 오늘의 흔적을 기록에 남기고 싶진 않았다. 타닥, 담배 끝에 옮겨 붙는 불꽃색이 꼭 지금 하늘 같아 노을을 태운 재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아프리카 종단 여행. 최한솔이 내 생일날 투하한 핵폭탄이었다.
“어딜 간다고?”
“아프리카.”
몸이 뻐근한 것도 잊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순식간에 비어버린 팔에 눈만 깜박거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던 최한솔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느릿하게 일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프리카, 갈 생각이야.”
“아니, 아프리카도 나라가 존나 많잖아. 그중에 어딜 간다는 건데?”
“모르겠어, 아직. 일단 알렉산드리아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고민 중이야.”
“그중에 어디?”
“…….”
“… 설마.”
“맞을걸.”
“그걸… 다 돌겠다고?”
최한솔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봤다. 아니, 쳐다만 보지 말고 말을 해봐, 개새끼야.
“… 진심이야?”
“응.”
“언제? 얼마나?”
“언제 갈지는 현지 쪽 하고도 얘기해봐야 해서 나도 모르겠어요. 기간도… 아직 제대로 안 짜 봐서 모르는데, 일단은… 다섯 달쯤.”
누가 귓구멍에 대고 38 구경 리볼버를 네 발쯤 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 혹시 예전에 키우던 개 이름이 다섯 달이었니? 그래서 그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막 튀어나오고 그래? 미끌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다 조금 굳은 얼굴로 최한솔을 마주 보았다. 붙잡을 게 이불밖에 없어서 손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천조각을 움켜쥐었지만 허성한 솜 덩어리는 얄팍한 부피감마저 주지 못해 헛손질에 다름없었다.
“내가, 내가 만약에,”
“응.”
“… 안 된다고 하면?”
어린애도 안 속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제발. 하지만 내 간절함은 금세 추욱 쳐진 눈꼬리로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는 최한솔에 오래된 폐가의 담장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만다.
“… 안 된다고 할 거예요?”
좀 전까지 한여름의 백사장처럼 바짝 달았던 게 우스울 정도로 나는 차갑게 식었다.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 너?”
“지금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어, 한솔아,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내 생일날이라는 뜻이야. 심지어 7년 차 애인하고 존나게 떡 치고 난 뒤.”
“별 뜻 없어요. 그냥 누워있다 보니 생각이 났을 뿐이야.”
“아하. 어련하시겠어.”
“… 형.”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결국 고함에 가까운 큰소리가 튀어나갔다. 나는 당황을 집어먹은 최한솔을 잔뜩 약 오른 눈으로 바라보다 긴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며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넌 지금 내가, 네가 한두 번 나가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것만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나 싶은 것 같은데,”
“… 그렇게는 생각 안 했어요.”
“그냥 닥치고 들어.”
“…….”
“다섯 달이면, 솔아. 일 년의 반이야.”
차라리 네가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을 간다고만 했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았을 거야.
“하다못해 스웨덴이나. 독일이나.”
“…….”
“왜. 왜 하필 아프리카야? 지구 상에 나라가 200개 가까이 있는데, 대체 왜 거기야? 거기 뭐 연락은 된대?”
“… 캠프 사이트나 건물에서는 되긴 될 텐…”
“확실하지도 않은 거네.”
“…….”
“내가 지금 이러는 건 네가 날 그 기간 동안 혼자 둔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네 생활이 있듯, 나도 내 생활이 있어. 너 없을 동안 그냥 내 일 하고 살면 돼. 단,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우리 7년이야. 7년이라고, 한솔아. 너랑 내가 남자랑 여자였으면, 진작에 결혼하고 애도 있을걸?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가버리면, 그러면 나는, 가서 어떤 일을 겪게 될 지도 뚜렷하지 않은 곳에 널 보내 놓고, 그냥 여기서 발만 구르고 있어야 된다는 거니? 누가 봐도 고생할 게 뻔한데, 그런 데에 너를 보내고… 나는, 나는 대체 뭘 해야 돼?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 아무 일도 없고, 평범하게 돌아올 거라는 실낱같은 기대만 붙잡고 있기? 심지어 평소처럼 3주나 한 달도 아니고, 다섯 달을?”
“… 최대한 내가 잘할게요. 형 걱정 안 되게, 내가,”
“최한솔. 내가 2년 전에 네 출국에 아무 소리 안 하겠다고 한 건, 이런 얘기가 아녔어.”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더라. 씻고 나와서 잤나.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차피 결론은 같은데 과정이 무슨 소용일까. 나는 최한솔의 솔직함을 이기지 못했고, 그건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도, 연애를 시작하고도, 연애를 하면서도 변함없었다. 최한솔이 아프리카를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을 가고 싶어 했던 이유와 똑같겠지. 그냥 가고 싶으니까. 겪어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 마음에 꾸밈 하나 없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았고, 나는 그런 최한솔의 진심에 번번이 발이 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최한솔이 했던 말들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서글펐다. 최한솔은 거짓말을 못하는 애라서. 최한솔은 내가 서글퍼질수록 더욱 솔직해지려 애쓰는 아이였기에. 우리가 돌리는 악순환의 쳇바퀴는 박차만 가해졌다.
나는 최한솔의 진심을 알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최한솔은 나를 존중하려 하지만 내 진심은 모른다. 이대로라면 한솔아, 우리는 평생 서로가 내준 수수께끼만 풀다가 죽어버릴지도 몰라. 질깃하게 씹히던 담배에서 비릿한 종이 맛이 났다. 나도 모르게 앞니에 너무 힘을 줬는지. 찢어진 담배를 대강 바닥에 버리고 발로 으깬 뒤 새 개비를 꺼내려 곽을 꺼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네.”
“응. 담배 피우려고.”
나는 다가오는 정한이 형을 슬쩍 곁눈질로 돌아봤다가 아직 안 핀 척, 짓이긴 담배에서 발을 치우지 않고 곽에서 하나를 꺼내 물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윤정한에게 곽을 열어 보이자 고개를 젓는다.
“형 그때 담배 끊고 한 번도 안 폈어?”
“안 폈지, 그럼.”
“진짜 대단하다.”
“석민이가 워낙 싫어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게 대단하다는 건데.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고 담배에 불만 붙였다. 어느새 노을도 지고, 어두워진 길에 담뱃불만 고요히 신호등처럼 깜박거린다. 꼭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다가왔던 형은 옆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두어 번 연기를 내뱉던 나였다.
“요즘 정신없지? 석민이 샵 오픈에, 결혼 준비에. 편집장 일이야 늘 바쁠 거고.”
“결혼이야 뭐… 우리가 예물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고, 어차피 식만 올리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쓸 게 있진 않은데, 샵은 좀 정신없긴 해. 워낙 애가 자기 일은 혼자 잘하니까 막, 되게 많이 손 갈 건 없는데, 그래도 마음은 쓰이지.”
“그래도 부럽다. 결혼하고.”
“야, 그렇지도 않아. 어차피 반쪽이야. 아버지 결국 안 오신댄다.”
“아….”
“이쯤 되면 아버지나 나나 둘 중 하나는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쉽지 않네.”
형과 이석민은 나와 최한솔보다 더 역사가 길었다. 올해로 14년 차를 채우는 둘은 우리의 꼭 두 배였다. 둘은 형이 제대 후 복학하고 처음 간 축제에서 만났다고 했다. 누가 봐도 나 공대생이요, 티 내는 체크무늬 셔츠에 뿔테 안경을 끼고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꼬옥 쥔 채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던 신입생, 그게 형이 처음 본 이석민이었다. 하긴, 석민이가 노래를 잘 하긴 하지. 하고 나랑 최한솔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반한 건 아냐. 물론, 석민이가 노래를 잘 하긴 하는데, 그건 포인트가 아니었어. 이석민이 노래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려 계단으로 가는데, 사회자가 이석민을 부르더니 갑자기 브레이크 댄스를 요청하더란다. 알고 보니 둘은 친한 사이였고, 축제 분위기를 띄우려는 욕심이 너무 강했던 사회자가 무리수를 던진 거였다. 그럼 안 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이석민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그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몸을 흔든 것도 아니었다. 계단에 내렸던 한 발도 도로 올리더니 얼른 무대로 가 몸을 굴렸다는 거다. 한참 그렇게 쇼를 하고 일어선 이석민의 셔츠는 먼지가 다 묻어 꼬질해졌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바보 같이 웃으면서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이석민을 보며 형은 결심했단다. 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정말 그럴 생각인지 형은 이석민과 올해 9월 식을 올린다고 했다.
“그래도 어머님이라도 오시는 게 어디야. 말 못 하고 지내는 사람들도 천지에 깔렸는데. 심지어 석민이네는 다 오잖아.”
“그야 그렇지. 하… 모르겠다. 제일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는 10년만 지나면 괜찮아지시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 20년으로 늘렸잖아, 나 참… 아, 석민이한테는 말하지 마. 걔한테는 그냥 편찮으셔서 못 오신다고 했어. 걔는 지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면서 자꾸 미안해해.”
“알아. 말 안 해.”
“시간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지. 그래도 설마 평생 안 보고 사시겠어. 아무튼… 너네는 어떤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돌아온 화살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모른 척 길게 연기를 뱉어 당황을 가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뭐가?
“그냥, 어떻냐고. 너는 계속 말씀 안 드리려고?”
“어후, 당연하지. 말도 마. 나 저저번 주에도 선 보고 왔어.”
“대단하다. 안 답답해?”
“내가 답답한 게 우리 엄마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는 것보단 나아. 마흔 넘으면 포기하시겠지.”
“한솔이는 말씀드렸다 하지 않았어?”
“걔는, 형. 걔는 부모님한테 말씀을 드린 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 사귄 지 1년쯤 지나서인가, 갑자기 자기 집에서 자기 가족하고 저녁을 먹재. 그래서 뭐, 친한 사이끼리는 집에도 종종 놀러 가니까 괜찮겠지― 하고 편한 마음으로 갔다? 그랬는데 진짜 막 진수성찬이 있는 거야.”
“아― 맞아, 맞아.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그때 막, 육회하고 그런 거 있고.”
“몰라, 반찬만 몇 개더라, 아무튼. 거의 집안 행사 수준? 그래서 아니, 아무리 아들 친구라도 이 정도까지 하나?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싶어서 넘겼다? 근데 얘가 자꾸 부모님 앞에서 막 나를 만지는 거야!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그래서 내가 너무 쫄려가지고 야, 왜 자꾸 이래, 좀 가만히 있어, 속삭였더니 하는 말이, 아, 어머니 아버지 우리 사이 아세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맞아, 걔 그랬댔지.”
“나 완전 식겁했다니까? 그래서 그 날 처음으로 싸웠잖아. 내가 그냥 친구로서 뵙는 거랑 애인으로 뵙는 건 천지차이라고 말했는데 걔는 끝까지 이해를 못 하더라. 아마 지금도 모를걸. 뭐가 문제인지.”
아마 지금도 모를걸. 뭐가 문제인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찌른다. 내가 뱉은 말의 청자에는 나도 포함되므로. 갈비뼈에 찌릿하게 와 닿는 통증을 무시하려 나는 급하게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솔이가 참… 순수해. 그래서 걔 책이 인기 있는 것 같아. 순수한 눈으로 보고 온 세상을 솔직하게 담으니까. 걔 원고 보면 재밌어.”
“… 솔직하긴 하지, 걔가. 순진하기도 하고.”
“민규야.”
“왜.”
“너 괜찮아?”
아, 따거. 언제 필터까지 타들어간 건지 왼손 검지와 중지가 따끔한 느낌에 나는 화드득 손을 털어 짧아진 꽁초를 땅에 내던졌다. 그나저나, 뭐라고 형?
“너 괜찮냐고.”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쟤 보내고 괜찮겠어?”
“… 형도 석민이 유학 기다렸잖아.”
“프랑스하고 아프리카는―”
“그리고,”
“…….”
“안 괜찮으면 뭘 어쩌겠어, 내가.”
그래, 어쩌겠어, 내가. 순응보다는 단념에 가까운 내 말에 형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여름밤 여치 소리가 우리의 공백을 메운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간 동상처럼 서 있었다. 민규야.
“왜.”
“이건 그냥 형이 노파심에 묻는 건데,”
“응.”
“너네… 혹시 지금 장마철이니.”
장마.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끝났어.”
이제 우리가 같이 젖어드는 비는 없어. 비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스콜에 나만 홀로 침몰할 뿐.
“더 이상 장마는 안 와, 형.”
차에 올라탄 최한솔은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금 내게 사과를 전하려 했다. 민규 형, 내가 말 안 했던 거― 그리고 나는 그런 최한솔을 제지했다. 한솔아, 우리 일단 집에 가자.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너는 말을 아끼고, 나는 생각을 아낀다. 서로의 설렘을 운반하던 공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거울의 방처럼 변해버렸을까. 아낀 생각들을 쌓고 쌓아 더 이상 쌓일 틈이 없을 때까지 쌓아 올리고 나면 어차피 너에게 전하지 못할 마음들은 하나씩 버려나갔다. 그렇게 버리다 보면 결국 너에게 전할 것은 너절한 낙엽마저도 없는 텅 빈 가슴이었다. 그리고 그런 밑바닥에서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나 화 안 났어, 한솔아.”
진짜 화 안 났고, 조금 놀랐을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 그냥 이 얘기하지 말자. 11월은 기억하고 있을게. 차고에 차를 주차시키고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늘 솔직한 너는 반짝 윤이 나게 잘 닦인 거울 같았고, 그 투명한 표면에 비친 것은 초라한 내 모습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마주 보고 네 거울의 단면에 베인 상처를 견뎌야 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형. 최한솔의 손이 다소 다급하게 내 오른손에 휘감겨온다. 나는 아주 멀쩡한 척 뻔뻔하게 희미한 미소까지 지어주면서 그 손을 한 번 꽉 힘주어 맞잡아주었다가 놓고는 차 문을 열었다.
“가자.”
“민규 형.”
“나 진짜 괜찮으니까, 그렇게 아련하게 부르지 좀 말아줘.”
“…….”
“근데 나 배가 안 고파서, 그냥 서재에 있을게. 미안. 너 배고프면 뭐 먹고. 피곤하면 일찍 자.”
네게서 허름하게 닳아버린 나를 읽어내는 일은 변함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너를 바꿀 수는 없어서, 나는 나를 깎았다. 네게 비친 내가 나인 줄 모르게,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게. 나는 내가 지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을 얼굴에 띄운다. 밤바다의 물보라처럼 지나치게 애틋해진 채 그대로 굳어버린 네가 나의 다정에 질식할 수 있게끔. 수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뒤늦게 찾아낸, 너에게 행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엾은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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