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밍] 폴리와 줄리_2

2020. 1. 7. 16:22

오늘 오전에는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이는 여름의 막이 본격적으로 걷혔음을 의미한다. 덥다. 무덥다. 나는 입고 있는 반팔 면티의 옷깃을 잡고 팔락거려 보았지만 이내 별 소용이 없음을 깨닫는다. 에어컨을 켤까, 방 안 한쪽 귀퉁이에 붙은 벽걸이형 에어컨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나는 그보다 좋은 해결책을 떠올렸다. 컴퓨터 모니터 앞의 작은 휴대용 선풍기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한 지갑도 집어 들었다. 남들에게는 이 외출이 결코 더위를 이겨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것은 무엇보다 좋은 해결책이다. 왜냐하면―…

 

 

“있어?”

 

 

나는 그의 방문 앞에 서 문고리를 돌리기 전 가볍게 두 번, 노크하였다. 똑똑, 하는 나무 두들기는 소리가 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청아하다. 방 안에서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잠시 난간을 짚고 서 아래층을 내려다 보았다. 주방의 아일랜드 바 귀퉁이와 응접실의 소파들이 놓인 모양새가 테트리스 게임 같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위를 올려봤다. 조금 고풍스러운 느낌의 몰딩이 된 천장 가운데에는 3단 웨딩 케이크같이 늘어선 크리스탈들이 빛나고 있다. 나는 샹들리에만큼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조명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이 끝날 동안 방 안에서 돌아오는 답은 없다. 나는 차가운 금속 재질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경첩에는 기름칠이 잘 되어있어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나는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방 안으로.

 

 

“…….”

 

 

그는 방에 없었다. 토요일 오전인데, 어딜 간 것일까. 나는 두어걸음 더 들어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유칼립투스 숲이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도 같은 향이 나냐고.

 

우리는 같은 샴푸를 쓴다.

 

그의 책상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책장도 마찬가지다. 온통 수능, 모의고사로 시작되는 책들뿐이다. 전형적인 고3의 책상이다. 깔끔하고 무난한 흰색 스탠드, 사기로 만들어진 둥근 원통형의 연필꽂이, 어제 마신 커피 자욱이 말라붙은 채 남은 머그잔, 풀다 만 영어 문제집, 샤프 한 자루와 빨간색, 파란색 볼펜 각각 한 자루씩. 컴퓨터는 없다. 김 변호사님의 방침이다. 그는 고삼이니까. 나는 그 모든 것에 손끝을 대본다. 종이는 반드럽고, 필기구는 매끌거리며, 스탠드는 부드럽고, 연필꽂이와 머그잔은 매끄럽다. 나는 조용히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가 무언가를 마실 때 어느 쪽으로 마시는지 잘 알고 있다. 왼손잡이인 김민규. 나는 오른손으로 잡았던 머그잔을 왼손에 옮겨쥐었다. 그리고 그가 늘 입술을 대던, 잔 테두리의 한 곳에 가만히 입술을 댄다. 그가 늘 그랬듯이. 유칼립투스 향이 난다.

 

 

“… but I still need love―”

 

 

어디선가 주워들은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는 그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언제쯤 돌아올까. 아니, 애초에 어딜 간 것일까. 서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만약 그렇다면 그는 내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서재는 그의 방과 내 방의 중간쯤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문턱에 기대 서 그의 방 맞은편에 위치한 내 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문과 내 방문의 사이에는 약 6미터 정도의 거리가 존재한다.

 

그와 나의 방, 그리고 서재와 손님용 침실이 있는 2층은 ㄷ자로 생겼는데, 통로의 폭은 1미터 30센티 정도쯤이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마찬가지로 대리석으로 된 2층 계단을 올라오면 계단 끝자락에서 50센티쯤 앞에 내 방문이 있다. 그곳에서 1미터쯤 걸은 뒤 왼쪽으로 모퉁이를 꺾어들어 6미터가량의 짤막한 복도를 지나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그의 방문 앞에 당도한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그 정도의 거리는 형제간의 방 거리로는 적절한 거리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가까웠다면… 어쨌거나 그는 그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내 방 앞을 지나야 한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서 그는 어디로 갔는가. 내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토요일 오전이다.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왜 나에게 외출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는가. 나는 이런 생각들의 연쇄고리 틈새에 끼어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없는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가 모르는 그의 시간을 싫어한다. 눈을 감았다. 얼핏 보기에 나는 자거나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내 모든 감각은 열린 문 밖의 층계로 향하고 있다. 사부작이는 발자욱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길 기다린다. 나는 그에 관한 것이라면, 그토록 미세한 것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확실치는 않으나 나는 내 짐작이 정확하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그의 책상 위로 난 창문에서 들어온 햇빛에 의해 만들어진 연필꽂이의 그림자가 정오 경의 방향이었으며, 아까보다 더 후덥지근해진 방 안의 온도가 정오의 온도였고, 계단을 올라오는 그의 발소리가 정오 쯤의 발소리였다. 나는 그에 관해서는 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은 정오 경의 시간인 것이다. 이윽고 그 발소리는 ㄷ자의 통로를 통과하며 살짝 멀어졌다가 점점 가까워져 이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뭐야, 여기 있었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짤막한 반가움을 표했다. 그가 나를 보고 웃는 일은 잦지 않았으나 이따금 이렇게 눈을 휘어 웃을 때면 내 입꼬리는 나도 모르는 새에 올라가 있곤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영 웃지 못했다.

 

 

“… 어디 갔다 왔어.”

 

 

그의 이마에 매달린 땀방울 몇 개와 발갛게 상기된 볼이 더운 바깥을 담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내 눈을 마주하더니 입꼬리를 짓궂게 끌어올렸다. 내 표정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산책.”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음은 그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말고, 누구랑, 어디, 갔다 왔냐고. 말도 없이.”

“말했잖아. 혼자. 산책.”

“… 어련하시겠어.”

 

 

나는 단물 빠진 껌을 투, 하고 뱉어내듯 말을 짓이기며 던져놓곤 더운기가 풍기는 그를 지나쳐 방을 나와버렸다. ㄷ자의 길 위에서 나는 부러 발을 거세게 구르며 내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즐거움이 스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약이 바짝 오른 나의 눈동자를 똑똑히 읽었을 것이다. 지금 쿵쿵대는 내 발걸음 소리도 들었겠지. 그럼에도 그는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방에 들어와 쾅 소리가 나게끔 짐짓 문을 세게 닫았다. 충격에 의해 바르르 떨리는 문의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고 그 떨림은 이내 기쁨의 전율로 내 몸을 훑어 나는 침대에 나를 와락 내던졌다.

 

나는 그가 왜 나의 약 오른 눈동자를 보며 즐거워했는지 알고 있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뭐야, 여기 있었네.’라고 했다. 내 방을 지나쳐오며 내 부재를 확인하고 나를 찾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계단을 올라올 때 그가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생각한다. 내가 그러듯이. 그리고 그는 나의 의심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더 하라는 듯 부추기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의중을 알았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약 올라 주었다. 우리는 질투를 놀이처럼 즐겼다. 이제 곧 그가 내 방을 찾을 것이다.

 

그는 5분쯤 뒤에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 그가 물었고, 나는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우리는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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