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부] 샅

2020. 2. 26. 22:54

승관이 집을 나갔다. 그것은 마치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원우는 휑뎅그렁 비어버린 여백을 보면서도 머리만 넘겼었다. 곧 오지 않을까? 퇴근길 사 왔던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면서 든 생각이 고작 짧은 물음이 전부였을 정도로, 원우는 승관의 가출에 현실성을 부여할 수 없었다. 잠시 외출한 거겠지. 지금에서야 서랍 한 칸을 깨끗하게 비워간 사람을 외출했다 여기는 것이 우습지만 그때 원우는 수저질 때문에 시큰거리는 어깨의 파스를 새 것으로 갈며 그런 생각만 했다.

 

승관은 그다지도 천연하게 떠나갔다.

 

다음 날, 비번임에도 오전 6시에 눈을 뜨고 나서야 원우는 승관의 외출이 영 가출이라는 것을 알았다. 낡은 시트 위를 더듬는 손바닥 아래에는 묵직한 무게감 대신 희미하게 구겨진 그림자만 깔려 있었다. 시야를 흐릿하게 가로막던 졸음이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증발했다. 용수철이 망가진 침대 매트리스는 승관의 옆모습대로 가라앉아 그의 옆선을 품은 석고틀과 같았다. 원우의 손이 승관을 쓰다듬듯 느리게 울퉁불퉁한 빈자리를 쓸었다. 승관은 사라졌으나 침대보엔 승관이 배겨 있었다. 손바닥의 꺼슬한 굳은살에 시트 보푸라기가 걸려 뜯기는 소리를 들으며 원우는 손을 멈췄다.

 

네 시간이 지나 오전 10시. 원우는 일어나 앉아있었다. 허리춤을 베개로 괸 채 그는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그러나 이미 숨이 다 죽어 납작해진 베개가 허리를 제대로 받쳐줄 리 없었고, 베개보다는 방석에 가까운 천 조각과 원우의 허리 사이에는 반 뼘 정도의 여백이 있었다.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침대보에 길게 어린다. 원우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의 눈동자는 맞은편 서랍의 첫 번째 칸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시간째였다.

 

 

 

왜 갔을까, 너는.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는 헤어진 걸까. 원우는 승관이 집을 나가기 바로 전 날을 떠올렸다. 무언가 언질이 있었는데 내가 놓친 걸까, 생각했지만 실마리는 없었다. 심지어 다음 주 네 생일에 무얼 할지 먼저 얘길 꺼낸 사람은 네가 아니었나. 먼지들과 함께 어지러이 부유하는 생각들에 동공의 초점이 흐려지면 서랍이 두세 개로 번졌다가 눈을 깜박이면 다시 서랍이 선명해졌다. 몇 시간째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는 짓이었다. 뭐가 문제였니, 너는.

 

내게 말도 꺼내기 싫을 만큼 내 전부와 얽힌 문제가 너를 이 공간에서 내몰았고, 나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여전히 몰랐다. 아야. 따끔한 오른손바닥의 통증에 그제야 원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지저분하게 뜯긴 굳은살 틈새로 몽글몽글 붉은 액체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왼손 엄지는 어느새 피투성이였다.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계속 쥐어뜯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게 문제였던 걸까. 물끄럼 손바닥 틈새로 새어 나오는 핏방울들을 내려보며 원우는 손톱 밑까지 붉게 물든 왼손 엄지를 입에 물었다. 너는, 어디 있을까. 원우는 승관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일주일이 지났다. 원우는 승관이 없는 집에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고 있었다. 승관은 번호가 바뀌어있었다.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몰랐다. 일주일 동안 걸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원우는 어쩌면 승관이 떠나간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승관의 목소리가 덧입혀진 정답은 들을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정답보다 승관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져 어쩔 수 없이 번호를 눌렀을 때는 이미 늦었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래도 너도, 살아가고는 있는 모양이구나.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 일러주는 친절한 여자의 음성을 들으며 원우가 한 생각이었다.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승관의 소식을 제대로 듣게 된 때는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그 소식이라는 것은, 5월 중순에 내리는 눈처럼 굉장히 난데없는 곳에서 들려와서, 원우는 어금니 새에 끼운 칫솔모를 지그시 깨물었다.

 

 

'시트콤 내 곁에서, 모두들 기억하시나요? 이 시트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시라면 아주 귀여운 악동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강솔찬 역할도 기억하시겠죠. 네, 작년에 방영한 <주홍빛 사랑>에 카메오로도 출연하셨던 배우 윤정한 씨의 아주 사랑스러운 아역시절인데요, 그 후 한 동안 작품 활동을 쉬시는 듯했던 윤정한 씨가 최근에 꽤나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소식으로 팬들 곁을 찾으셨습니다. 영상 보시죠.'

 

 

요란한 자료화면들과 시끄러운 배경음, 거기에 온갖 수식어가 붙은 멘트들을 요약한즉슨, 윤정한이라는 잊혔던 배우가 동성애인과 결혼 발표를 했는데, 그 동성애인은 부승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라는 얘기였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얘기는 의심할 의지를 꺾어버린다. 그래서 원우는 TV에 나오는 제 전애인의 얼굴을 마치 저랑 아무 관련 없는 남의 얼굴을 건너다보듯 멀거니 바라봤다. 화한 민트향이 목젖을 간지럽혀 원우는 잔기침을 했다. 결국 알려주는구나, 네 소식. 넌 여전히 착하네. 목 뒤로 넘어간 양칫물을 뱉어내기 위해 세면대에 헛구역질을 하며 원우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승관은 예쁘게도 웃었었다.

 

 

 

 

 

그래도 시간은 시간이더라. 두 달의 숨결이 원우의 집을 훑고 지나가자 곳곳에 깃든 승관의 색은 서서히 바랬고, 원우는 점차 승관이 없는 집을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는 집 정리를 시작했다. 한 쌍이었던 모든 것들을 한 개만 남기는 작업이었다.

 

승관의 칫솔을 내다 버리려 손에 감아쥐고 문을 열었던 11월의 마지막 날, 그 새벽, 원우의 눈앞에는 승관이 서 있었다. 원우는 놀랄 여유조차 없어 말없이 깜박, 눈만 한번 감았다 떴다. 또 다른 지나친 비현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암말 없이 그저 슬쩍 비켜 서 승관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승관은 여타 인사도 없이 원우의 집 안에 몸을 들였다. 문은 열렸던 모양 그대로 닫혔다. 원우의 손에 들린 칫솔이 다시 제자리에 꽂혔다.

 

원우는 서랍 마지막 칸에서 누렇게 떼가 낀 베개를 꺼냈다. 쌍쌍의 것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가는 집에서 추방당하지 않은 유일한 반쪽짜리 물건이었다. 침대 가운데로 자리를 옮겨 두었던 제 베개를 한쪽에 치우치도록 옮기고 승관의 베개를 침대 제 옆에 놓았다. 바닥에서 자겠냐고 물어보지 못한 이유는 바닥에서 잘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원우와 승관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햇빛이 잘 드는 집은 밤에 달빛도 잘 들었다. 낮에는 장점이었다가 밤에는 단점이 되는 창문이 달린 집. 그 집에서 원우와 승관은 각자의 숨을 내뱉고 있었다. 숨소리가 여전하네. 너덜하게 헤진 침대보 가장자리의 실밥을 툭툭 잡아 빼던 원우는 숨소리에서 예전의 승관을 찾았다. 그리고 그 소리를 좀 더 제대로 듣기 위해 원우는 되레 숨을 죽였다. 그때, 승관이 뱉은 것은 숨소리가 아니라 말소리였다.

 

 

“형은 여전하네요.”

“…….”

“여전히 내가 싫어하던 모습 그대로야.”

 

 

원우는 입술도 달싹이지 않았다. 승관이 말 오랜만에 듣네.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자 짤막한 생각이 속눈썹에 매달려 있다가 베개로 톡 떨어져 도르륵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승관은 원우가 듣든 말든 좀 떠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윤정한 봤죠? 봤겠지. 형 아침마다 뉴스 보잖아요. 그게 형이 세상이랑 하는 소통의 전부잖아.”

 

 

원우는 눈 깜박임도 멈췄다.

 

 

“그 새끼 여자 엄청 좋아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게이 아니라고. 그거 다 쇼예요.”

 

 

그렇구나. 원우는 속으로 대답했다.

 

 

“형은 아홉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자죠. 그리고 공사판에 출근하고. 나는 밤 열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일을 나갔어요.”

 

 

계속 잔잔한 표면을 유지하던 원우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옅은 파문이 일었다.

 

 

“이 집 근처 싸구려 술집 알죠? 왜, 골목길 돌아서 지하에. 거기에 일을 나갔어요. 돈을 꽤 많이 주더라고. 형이 열두 시간 꼬박 일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줬어요. 나는 여섯 시간밖에 안 일했는데.”

 

 

승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을 잠시 멈췄다.

 

 

“… 그러다 거기서 윤정한을 만났어. 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이유는 몰라요. 나는 그때 중요한 게 이유가 아니었거든. 나한테 중요한 건 윤정한이 세 번째로 가게에 왔을 때 한 제안이었어요. 돈을 주겠대. 지금 당장은 2억밖에 못 주는데 잘만 해주면 2억을 더 주겠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컴백을 해야 하는데 기사거리가 필요하대. 정말 확, 전 국민이 놀랄만한. 그리고 날 쓰고 싶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승관은 뒤로 갈수록 말을 급하게 뱉었다. 목소리에 격앙된 투는 없었으나 문장 간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었다. 흥분했구나. 원우는 조용히 길게 숨을 한번 내뱉었다.

 

 

“… 나는 형을… 참을 수가 없었어…. 형은 항상 무력했고, 먼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사판처럼… 형은 정말… 시체보다 죽은 인간이었던 거야―….”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지 혹은 졸린 건지 승관의 말꼬리는 시든 버드나무 줄기마냥 죽죽 늘어졌다. 이 집구석도 그래서 끔찍했어…. 정말이지 이 집에 있을 때면… 나는 차라리 생매장당하는 것이 더 즐거울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장승보다 더 굳어버린 인간이랑 나는 더 이상 숨을 섞고 싶지 않았어―… 승관의 목소리는 점차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원우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져 옴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가버린 거야. 게이 흉내를 내면서라도 살아보겠다는, 어떻게든 이 삶을 살겠다는 윤정한이 차라리 좋아서… 그 사람 곁에서는 숨이라도 쉴 수 있겠다 싶어서―”

 

 

그랬구나. 응. 승관의 말에 원우는 대답했다. 아니, 꿈이었던가? 아니다, 정말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하게 눈앞이 점멸했다. 그랬구나. 그랬었어. 원우는 까무룩 침대 속으로 녹아들었다.

 

해가 잘 드는 집에는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들었다. 샛노오란 햇살이 중천에 떠 원우의 허여멀건한 얼굴에 드리웠을 때 원우는 눈을 떴다. 협탁 위 폰을 집어 들어 시계를 봤다. 오후 12시 3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정오를 지난 시각까지 잠을 잤다.

 

굼뜨게 뜬 눈꺼풀만큼 느리게 원우가 몸을 일으켰다. 정면만 향하던 고개가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꾸득꾸득 돌아갔다. 들어차 있었던 옆자리는 깔끔하게도 비어 있었다. 베개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제 이 집에 남은 반쪽은 그 무엇도 없었다.

 

전원우, 자신을 제외하고는.

 

원우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벽에 걸린 조잡한 달력의 종잇장을 찢어냈다. 12月이라 적힌 촌스런 글자를 굳은살 배긴 손으로 꾹꾹 눌러보던 원우는 욕실로 향했다. 계절과 계절의 샅에 남은 것은 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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